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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끼장미 Feb 05. 2022

엄마만 철석같이 믿었던, 철부지 엄마

엄마가 되어가는 시간

그때,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를 남겼다. 

“ 전문가보다는 핏줄이 낫다. 네가 안 하면 내가 한다.”

그리고는 내 품에 안겨있던 아이를 안고 목욕을 씻기러 욕실로 들어갔다. 뒤돌아 앉은 커다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누군가 육아휴직을 해야 한다면, 아빠보다는 엄마가 낫겠지….’’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육아휴직을 했다. 

 육아에 대한 부담과 함께 직장에서의 상황도 마음에 걸렸다. 고2 담임을 맡고 있던 상황이라 육아휴직을 하게 되면 중간에 담임이 바뀌어야 한다. 휴직하더라도 맡았던 아이들 1학기는 마무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나만?’ 이란 생각에 억울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자에게만 온전히 부담 지워지는 것이 싫었다. 휴직으로 인한 경력단절의 책임도 고스란히 내 몫이 되어야 하는 것도 화가 났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면 지금처럼 불가피한 일들이 생길테니, 이참에 도움을 요청할 전문가(베이비시터)를 구하자고 했다. 

 겁이 덜컥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늬만 엄마였다. 내 손으로 이유식 하나 제대로 끓이지 못해 방학이면 일주일에 두어 번을 시어머니께서 다녀가셨다. 워낙 체력이 약했던 나인지라 시어머니께서 끓여주신 이유식을 꺼내 데워서 먹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벅찼다. 그런 내가 아이를 온전히 돌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해 다른 지역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면서 다시 위기가 왔다. 당시 고등학교는 야간자율학습이 의무였고, 야간자율학습 감독 날에는 아무리 일찍 와도 잠들어 있는 아이밖에 볼 수 없었다. 퇴근이 늦어지면서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리던 시어머니께서도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그 후로는 신랑과 퇴근 시간을 조율해 가능한 한 일찍 퇴근해 아이를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유방암 진단으로 더 이상 아이를 돌봐주실 수 없게 되었다. 아이 돌봐주시느라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건강을 앗아갔다는 죄송스러움과 함께 아이를 온전히 돌봐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그때가 아이 15개월 무렵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늬만 엄마였다. 내 손으로 이유식 하나 제대로 끓이지 못해 방학이면 일주일에 두어 번을 시어머니께서 다녀가셨다. 워낙 체력이 약했던 나인지라 시어머니께서 끓여주신 이유식을 꺼내 데워서 먹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벅찼다. 그런 내가 아이를 온전히 돌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개학일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많아졌다. 친정엄마는 마비된 오른쪽 팔 수술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남편이 시어머니께 어렵게 부탁해서 아이를 돌봐주시게 되었다. 당시 퇴계원에 사셨던 어머니는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고, 출퇴근해주시면서 아이를 돌봐주셨다. 당시 중학교에서 근무했던 나는 육아시간을 사용해 3시 30분이면 퇴근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시어머니를 일찍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평온한 6개월을 보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친정에 내려갔다가 일요일 밤에 아이를 재워 놓고 올라오는 ‘주말 엄마’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생아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드셨을 친정엄마는 주말이면 더 분주했다. 딸과 사위 식사 준비에 챙겨 보낼 반찬까지 장만하시느라 쉴 틈이 없었다. 결국 친정엄마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오른쪽 팔이 마비되어 거동도 힘든 사실을 나의 여름 방학까지 숨기고 계셨다. 일하는 딸이 마음 쓸까 봐 안아 주지도 못하는 아기를 그냥 보내지 못하고, 방학까지 기다리신 거였다. 그냥 쉬셔도 좋으련만 내가 힘들까봐, 집안일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아이를 안게 하시고 함께 올라오셨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어찌나 눈물을 흘리시던지...... 방학 동안 쉬면 나을 테니 방학 끝나고 춘천으로 데리고 오라시길래 아무말 없이 꼭 안아 드렸다. 돌봐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친정엄마도 울고, 엄마를 힘들게 했던 내가 죄송스러워 나도 울었다. 그렇게 나는 눈물로 지새운 ‘주말 엄마’ 생활을 6주 만에 끝내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 돌보느라 엉망이 되었던 머리도 새로 하고, 복직 기념으로 옷도 몇 벌 장만했다. 밤중 수유로 잠이 늘 부족해 제대로 씻고 먹을 수도 없었으니 복직을 준비하며 곧 다가올 해방에 설레기까지 했다. 복직 준비를 하는 내내 곧 누리게 될 달콤한 자유만 생각했지, 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어떨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친정(춘천)과 과 직장(의정부)은 차로 1시간 30분 남짓의 거리라 주말에만 아이를 보러 가야 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돌봐주시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출산휴가 마지막 날 밤 아이를 재워 침대에 눕히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의정부 집으로 올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집안을 가득 메운 적막함에 기분이 이상했다. 애써 마음을 누르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기가 곁에 없다. 10달을 배안에 품고, 석 달 밤낮을 곁에서 돌보던 아기가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고 너무 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복직 전날 밤을 남편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다.

 서른이 되기 한 달 전, 십 년을 연애한 그와 결혼을 했다. 함께 혼수를 준비한 어느 날 자취방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엄마가 키워 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는 직장일 열심히 해.”

늘 그랬듯, 나는 엄마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결혼 후 주말부부로 지냈던 우리는 만 3년이 되어서야 합가했다. 적지 않은 나이이기도 했고, 합가도 했으니 아이가 하나 생기면 좋겠다 싶었다. 그 후 5달 정도 후 아이가 생겼다. 원하는 때에 순조롭게 우리에게 와준 고마운 아이에게 ‘순순이’란 태명도 붙여 주었다. 기다렸던 아이라 기쁨도 컸다. 양가 어른들도 첫 손주 소식에 함께 기뻐하셨고, 그렇게 우리는 축복의 시간을 보냈다. 아직 엄마가 된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생명을 내 안에서 키워낸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정성을 다했다. 내가 먹는 음식을 아이가 먹게 된다고 생각하니 나쁜 음식은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하루 2~3잔은 족히 마셨던 커피도 먹고 싶지 않았고, 밀가루나 고기도 즐기지 않았다. 임신 전의 나는 다이어트를 핑계로 걸핏하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특히 탄수화물은 거의 먹지 않았는데, 임신 기간 내내 비빔밥이 어찌나 맛나든지 신기했다. 태교도 열심히 했다. 손바느질하면 영리한 아이가 된다길래 바느질로 배냇저고리와 딸랑이 인형을 만들었다. 클래식 음악도 듣고, 좋은 책도 듬뿍 읽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도 아가가 들으니 이쁜 말만 해야 한다고 서로들 조심했다. 


겨울방학쯤부터는 숨이 가빠지고 8자 걸음을 걷는 내가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막달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아이 낳기 1~2주 전부터는 꼼짝달싹할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틈틈이 산책하며 아이를 기다렸다. 그래서일까? 늦어질지 모른다던 초산인데도 녀석은 예정일보다도 2주나 일찍 세상 밖으로 나왔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배가 푹 꺼져버리던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를 품에 안는 기쁨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가득했다. 10달을 배에 품고 함께했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떨어져 지내야 하는 사실이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였나보다. 출산 이후 나의 눈물 바람이 시작되었다.




 아이 낳으면 키워주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친정엄마 이야기대로 퇴원 후 친정인 춘천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출산 이후 친정 부모님 도움을 받으며 아이를 키웠고, 주말이면 남편이 내려왔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나도, 키운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엄마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생아 목욕 씻기기, 젖몸살, 모유 수유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친정엄마는 넘쳐나는 빨래와 삼시 세끼 식사를 차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셨다. 결국 산후도우미를 구해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적응해 갔다. 친정엄마의 약한 체력이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친정 아빠가 계시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3개월의 출산휴가를 마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직을 결정했다.


 아이 돌보느라 엉망이 되었던 머리도 새로 하고, 복직 기념으로 옷도 몇 벌 장만했다. 밤중 수유로 잠이 늘 부족해 제대로 씻고 먹을 수도 없었으니 복직을 준비하며 곧 다가올 해방에 설레기까지 했다. 복직 준비를 하는 내내 곧 누리게 될 달콤한 자유만 생각했지, 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어떨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친정(춘천)과 과 직장(의정부)은 차로 1시간 30분 남짓의 거리라 주말에만 아이를 보러 가야 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돌봐주시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출산휴가 마지막 날 밤 아이를 재워 침대에 눕히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의정부 집으로 올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집안을 가득 메운 적막함에 기분이 이상했다. 애써 마음을 누르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기가 곁에 없다. 10달을 배안에 품고, 석 달 밤낮을 곁에서 돌보던 아기가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고 너무 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복직 전날 밤을 남편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친정에 내려갔다가 일요일 밤에 아이를 재워 놓고 올라오는 ‘주말 엄마’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생아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드셨을 친정엄마는 주말이면 더 분주했다. 딸과 사위 식사 준비에 챙겨 보낼 반찬까지 장만하시느라 쉴 틈이 없었다. 결국 친정엄마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오른쪽 팔이 마비되어 거동도 힘든 사실을 나의 여름 방학까지 숨기고 계셨다. 일하는 딸이 마음 쓸까 봐 안아 주지도 못하는 아기를 그냥 보내지 못하고, 방학까지 기다리신 거였다. 그냥 쉬셔도 좋으련만 내가 힘들까봐, 집안일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아이를 안게 하시고 함께 올라오셨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어찌나 눈물을 흘리시던지...... 방학 동안 쉬면 나을 테니 방학 끝나고 춘천으로 데리고 오라시길래 아무말 없이 꼭 안아 드렸다. 돌봐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친정엄마도 울고, 엄마를 힘들게 했던 내가 죄송스러워 나도 울었다. 그렇게 나는 눈물로 지새운 ‘주말 엄마’ 생활을 6주 만에 끝내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개학일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많아졌다. 친정엄마는 마비된 오른쪽 팔 수술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남편이 시어머니께 어렵게 부탁해서 아이를 돌봐주시게 되었다. 당시 퇴계원에 사셨던 어머니는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고, 출퇴근해주시면서 아이를 돌봐주셨다. 당시 중학교에서 근무했던 나는 육아시간을 사용해 3시 30분이면 퇴근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시어머니를 일찍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평온한 6개월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 해 다른 지역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면서 다시 위기가 왔다. 당시 고등학교는 야간자율학습이 의무였고, 야간자율학습 감독 날에는 아무리 일찍 와도 잠들어 있는 아이밖에 볼 수 없었다. 퇴근이 늦어지면서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리던 시어머니께서도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그 후로는 신랑과 퇴근 시간을 조율해 가능한 한 일찍 퇴근해 아이를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유방암 진단으로 더 이상 아이를 돌봐주실 수 없게 되었다. 아이 돌봐주시느라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건강을 앗아갔다는 죄송스러움과 함께 아이를 온전히 돌봐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그때가 아이 15개월 무렵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늬만 엄마였다. 내 손으로 이유식 하나 제대로 끓이지 못해 방학이면 일주일에 두어 번을 시어머니께서 다녀가셨다. 워낙 체력이 약했던 나인지라 시어머니께서 끓여주신 이유식을 꺼내 데워서 먹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벅찼다. 그런 내가 아이를 온전히 돌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육아에 대한 부담과 함께 직장에서의 상황도 마음에 걸렸다. 고2 담임을 맡고 있던 상황이라 육아휴직을 하게 되면 중간에 담임이 바뀌어야 한다. 휴직하더라도 맡았던 아이들 1학기는 마무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나만?’ 이란 생각에 억울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자에게만 온전히 부담 지워지는 것이 싫었다. 휴직으로 인한 경력단절의 책임도 고스란히 내 몫이 되어야 하는 것도 화가 났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면 지금처럼 불가피한 일들이 생길테니, 이참에 도움을 요청할 전문가(베이비시터)를 구하자고 했다. 


그때,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를 남겼다. 

“ 전문가보다는 핏줄이 낫다. 네가 안 하면 내가 한다.”

그리고는 내 품에 안겨있던 아이를 안고 목욕을 씻기러 욕실로 들어갔다. 뒤돌아 앉은 커다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누군가 육아휴직을 해야 한다면, 아빠보다는 엄마가 낫겠지….’’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육아휴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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