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16일, 일본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조선인 마을인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윤동주의 집은 파평 윤씨로, 나름 뼈대가 있는 집안인 데다가 오래전부터 명동촌에서 유지로 이름난 집이었습니다. 아명으로는 해환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해처럼 밝게 빛나라는 뜻이었습니다. 윤동주의 남동생들은 달환과 별환이라는 아명을 사용했으니, 윤동주의 시적 감각은 집안 내력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 명동촌이라는 마을은 일제의 억압에 한반도를 탈출한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반일 감정이 남다른 곳이었습니다. 일본을 부를 때도 일본(日本) 대신 왈본(曰本)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윤동주의 집안은 이 때문인지 독립운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윤동주의 어머니가 독립운동가인 김약연의 여동생이었고, 윤동주의 고모는 송창희에게 시집을 가 윤동주의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를 낳기도 합니다.
윤동주는 친구인 송몽규와 명동소학교를 다니면서 문예지를 출간하기도 합니다. (송몽규 또한 수필가로서 훗날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됩니다.) 이 명동소학교에는 윤동주와 송몽규 외에도 훗날 사회운동가로 명망을 날리게 되는 문익환이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때 윤동주가 보고 자란 간도와 만주의 자연환경은 윤동주의 시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윤동주와 문익환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는데, 숭실중학교 재학기간 중에 장준하를 만나게 되고, 숭실중학교가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전학을 가 정일권을 만나게 됩니다.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 정일권은 모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시기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인물이 됩니다.
윤동주는 이 후 상급학교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게 됩니다. 아버지는 의학과를 갈 것을 종용했으나, 윤동주는 문과를 지망하였고, 조부의 도움으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대학생활 동안 하숙을 하는 동안 밤거리를 거닐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1939년, 처음으로 시를 잡지에 투고해 원고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으나 곧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유학의 필요성 때문에, 히라누마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합니다. 윤동주의 일본 유학을 위해 집안에서 결정한 일이었지만, 윤동주는 개명에 대해 굉장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 괴로움은 창씨개명서를 내기 전에 지은 시인 '참회록'에 담겨 있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일본 유학생활이었지만, 일본제국은 조선인 유학생들을 항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친구였던 송몽규 또한 교토제국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송몽규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대한광복군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특별고등경찰에게 감시당하고 있었습니다. 송몽규와 친척 관계인 윤동주 또한 불량선인으로 찍혀 감시를 받았습니다.
1943년,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 모임에서 송몽규는 조선의 앞날에 대해 유학생들과 의견을 나누었고, 일본 특별고등경찰은 이것을 빌미로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발언자인 송몽규는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 책동'이라는 명목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윤동주 또한 같은 날 체포되어 역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뇌일혈로 인해 옥사하였습니다. 조국의 광복이 불과 6개월밖에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윤동주가 사망하고 10일 뒤, 만주 용정에 있던 가족들에게 전보가 도착했고, 가족들은 일본으로 건너와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함께 옥고를 치르고 있던 송몽규는 이때 가족들과 면회를 했고, 윤동주와 자기가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있었다고 알렸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윤동주의 죽음은 일본의 생체 실험이 원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 바닷물을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고 큐슈제국대학에서 대체혈액 개발 실험을 했던 것으로 밝혀져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윤동주가 사망한 뒤, 윤동주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인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를 세간에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친구였던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시를 엮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으로 출간하였습니다. 노스탤지어적인 초기 시와, 조국애와 어려운 현실에 대한 비애가 잘 나타나는 윤동주의 시는 아직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들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윤동주가 장준하와 친분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윤동주와 장준하, 문익한은 숭실중학교를 같이 다닌 것이 확실하고, 문익한 또한 숭실중학교 외에는 장준하와 학교를 같이 다닌 적이 없지만 친분을 유지했던 점을 보면,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가 서로 교류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문익환의 아들인 문성근의 증언도 일치하기에 친분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19수의 시를 뽑아 출간을 준비했으나 실패했고, 윤동주의 후배이자 교우인 정병욱이 원고를 챙겨두었습니다. 훗날, 정병욱이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고향집에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라며 부탁하였고, 그 것이 남아 있다가 출간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향일보 기자인 강처중과 윤동주의 동생인 윤일주가 시를 모았고, 여동생인 윤혜원이 고향집에 보관되어 있던 시를 가져와 총 116편의 시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윤동주의 육촌동생으로는 세시봉으로 잘 알려진 윤형주가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올해 윤동주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동주]가 개봉하게 되는데, 영화 [세시봉]에서 윤형주 역할을 맡았던 강하늘이 [동주]에서는 윤동주 역할을 맡는다고 합니다. (집안 전문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