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길. 즉, 공간의 이동을 전제로 하는 행위인 거다. 고로 13년째 전업주부이자 엄마로 살고 있는 내게 ‘여행’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낯선 단어다. 종종 아이들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일을 딱히 여행이라 부를 수 없는 건 장소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네 개의 뒤통수와 촐랑대는 아이들의 걸음걸이만 쫓다 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숨 돌릴 새 없이 날아드는 빨래의 폭격. 리셋은커녕 겨우 붙들고 있던 체력마저 소진되고 만다. 엄마가 된 후로 내게 ‘여행’은 이런 것이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일.
아이들이 들으면 섭섭해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이 그러하다. 아이, 나아가 아이들을 동반하고 길을 나서는 건 설렘보단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친구가 몇 번이고 추천했던 <여행의 이유>를 읽지 않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거다. 여행을 할 수 없는 내게 <여행의 이유>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목부터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책상 위에 올려둔 채로 대출과 반납을 반복하고서야 읽게 된 김영하의 여행기는 매혹적이었다. 단숨에 읽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예스 24에 들어가 결제 버튼을 눌렀다. 첫 번째 든 생각은 글을 정말 잘 쓴다였고, 두 번째 든 생각도 진짜 잘 쓴다였다. 김영하가 말하는 ‘여행’은 내겐 너무 요원한 일이라 거리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타격을 준 문장들이 너무 많았고, 그 문장들 속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다.
‘여행’을 ‘읽기 혹은 쓰기’로 바꾸면 내게도 멀지 않은 이야기가 됐다. 물리적 이동은 없지만 내겐 읽고 쓰는 행위가 그가 말하는 ‘여행’과 다르지 않았다. 대게 ‘집’이라는 ‘의무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루어지지만,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내게는 잘 정돈된 내 방이야 말로 순백의 시트만큼 안도감을 주는 가장 적절한 장소가 된다. 그가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떠나 낯선 도시와 호텔에 도착할 때, 난 커튼을 저치고 아침햇살에 부유하는 먼지들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한바탕 청소를 한 후에 내 방에 도착한다. 언제나 수고스러움을 동반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난, 그가 여행을 소망하듯 반복되는 이 시간을 그리워한다. 30분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한 시간을 집안일에 매달려야 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괜찮다. 그런 시간이 내겐 그림자(p126) 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
‘엄마’로 살아가는 내게 타인의 환대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기껏해야 독서모임이나 글쓰기 모임에 나가야 내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으로 살고 싶은 나는, 내게 필요한 타인의 환대나 인정을 스스로 구해야 한다. 그것이 내겐 읽기와 쓰기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작가’라는 이름 보다 ‘사람’이 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
작가는 말한다.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p97)”고.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알록달록한 아이들의 그림책, 잘 정돈된 이불 위에 무심하게 놓인 구멍 난 인형들. 이렇듯 일상의 부재를 온전히 실감할 수 없는 곳에서 고작 방문을 열고 떠나는 여행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걸 여행이라 부를 수 있다면 기다려 보고 싶다. 작가의 말처럼 가시적인 목표 달성은 하지 못하더라도 결과와 무관하게 인간은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니까(p23).
그러니 김영하의 매혹적인 여행기 앞에서 주늑들지 말자(사실은 너무 부러우니까!). 게다가 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지치지 않길 바란다. 아이들의 구멍 난 애착인형 사이에 누워서도 ‘나’를 리셋시킬 수 있다면, 장소와 무관하게 이미 여행은 시작 됐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