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격이 좋은 아주머니 세분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국밥 세 그릇을 주문했다. 요 앞에서 지금 막 에어로빅을 하고 나오는 길인데 배가 너무 고프다면서 고기가 많이 들어간 특 사이즈를 달라고 했다. 그리곤 밥 두 개 추가. “사장님,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우리 진짜 배 고팠거든. 밥이 이렇게 맛있어서 다이어트는 물 건너갔다 갔어. 잘 먹고 갑니다” 명랑한 인사를 남기고 나간 손님의 상을 치우러 갔을 땐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특 사이즈의 뚝배긴 지름도 크고 깊어서 꽤 많은 국물이 들어가는데, 고기는 그렇다 쳐도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다 드신 거다. 다섯 개의 밥공기와 김치, 사이드로 나오는 부침개와 식혜까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세 명이 자리에 앉자마자 국밥 세 그릇을 주문하고 나눈 이야기는 ‘다이어트’였다. 헬스를 끊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친구의 말에 마주 보고 있던 아이가 헬스는 근육을 만드는 운동이라 살이 빠지지 않고 오히려 몸무게가 늘어난다고 했다. 내가 해봐서 안다고.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진짜야?’라고 묻더니 울상이 된 얼굴로 자기는 정말 살을 빼야 하는데 그럼 어떡하냐고 또르르 눈물까지 흘렸다. 그때, 남아 있던 한 친구가 말했다. “야! 괜찮아, 울지 마.밥으로 풀어 밥으로. 사장님, 여기 밥 한 공기 추가요”라고. 추가한 밥은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던 친구 혼자 먹었는데, 아이들은 밥 한 공기를 더한 금액을 정확히 1/3로 나눠 계산을 하고 나갔다.
에어로빅과 국밥, 국밥과 다이어트라니. 이 맥락 없는 풍경에서 내가 본 건 ‘쿨함’이다. 거슬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한 태도. 고민은 고민이고, 밥은 밥이고. 국밥은 국밥이고, 다이어트는 다이어트라는. 그럼에도 다이어트 때문에 눈물을 보이는 친구에게 밥으로 풀라던 친구의 위로는 최근에 보고 들었던 어떤 말 보다도 따뜻했다. 그 밥은 얼마나 맛있었을까? 만일 내가 다이어트를 하는 친구였다면 그 장면을 평생 간직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신호에 걸려 잠시 멈췄을 때 횡단보도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아저씨를 보았다. 어깨너비로 적당히 벌어진 다리, 허리에 얹힌 손, 그위로 사정없이 돌아가던 머리.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어찌나 세게 돌리던지 저러다 머리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리곤 이어지는 다리 펴기.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만큼 납작하게 앉아 양쪽으로 한 번씩 쭉쭉쭉. 길 위에서 저렇게 큰 동작으로 몸을 풀 수 있다는 게 놀라워 넋을 놓고 바라보다 클랙슨 소리를 듣고서야 신호가 바뀐 걸 알았다. 이런 것도 쿨함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겐 정말이지 놀랍도록 신선한 장면이었다.
무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무얼 하든 why not? 이 되는 사람.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 생각이나 고민을 너무 오래 끓이지 않는 사람.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 ‘괜찮아’가되는 사람.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밥 두 공기쯤은 웃으며 해치울 수 있고, 대로변 사거리에 서서 찌뿌둥한 몸을 마음껏 풀 수 있는 사람도 그 축에 속할 거다. 잡다한 걱정과 불안을 가득 담고 있는 것도 모자라, 툭하면 뱉은 말과 받은 말을 곱씹거나 자기 검열 센서가 꺼질 날이 없어 만날 쓸데없이 속을 끓이면서 사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태도.
만일 다이어트 때문에 눈물흘리는 친구를 마주 한다면 난 어떤 말을 했을까? ‘밥으로 풀어 밥으로’ 같은 말은 백날을 고민해도 하지 못했을 거다. 위로의 말을 고민하다 아무 말 못 했을지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허이!! 으아! 헛! 합!건너편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에어로빅의 기합 소리를 들으면 자연스레 그날의 아주머니들이 생각난다. 오늘은 어떤 음식으로 즐겁게 허기를 달래셨을지. 그나저나 사거리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아저씨의 몸은 좀 가벼워지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