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Mar 26. 2023

선량하고 다정한 마음.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

계절이 바뀔 즈음이면  마음이 분주해진다. 어쩐지 한바탕 청소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싱크대와 장롱을 열어보고, 아이들 서랍장이며, 베란다, 신발장까지. 문 혹은 손잡이가 달린 것들은 기어이 한 번씩 열어보고 해야 할 일이 있는지 살핀다. 물건을 저장하거나 쌓아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자주 비우고 버리는데도 열어보면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제 아무리 빠른 손과 청소스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집 안을 돌보고 가꾸는 일에 있어서 완벽의 쾌감을 맛보기란 왜 이리도 어려운 건지. 막 청소를 끝내고 집 안을 둘러봤을 때,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너무 쉽게 이전으로 돌아가 버린다. 언제나 어지르는 건 '너-어-무' 쉬우니까.


요 며칠, 아이들 서랍 정리를 했다. 계절이 바뀌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겨울 잠바는 싹 걷어 세탁소에 맡기고, 봄 옷을 꺼냈다. 운동장에서 구르는 게  취미라 무릎이  해진 막내의 바지 세벌을 세탁소에 맡겼고, 작아서 못 입게 된 옷들은  헌 옷 수거함에 넣었다. 정리를 하고 보니 입을 옷이 없어 밤새 아이들 옷을 고르느라 애를 먹었다. 175센티가 된 첫째와 160이 된 둘째 옷을 고르는 건 고역이다. 첫째는 너무 크고 둘째는 까다롭다. 아동복과 성인복 중간에 끼어 뭘 사도 애매한 둘째 옷을 고르는데 족히 두 시간은 쓴 것 같다. 그나마 아동복코너에서 마음 놓고 옷을 고를 수 있는 셋째와 넷째는 얼마나 다행인지.(휴)



계절에 맞는 옷을 꺼내 주고 작고 낡은 옷 대신 깨끗하고 넉넉한 옷을 새로 넣어둘 때면 다정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희고 반듯한 모의 새 칫솔을 꼽아두거나, 깨끗하게 빨아 쨍한 운동화를 신발장에 정리하고 바라볼 때처럼 마음이 환해진달까?. 서랍장은 금방 엉망이 될 테고, 빳빳한 새 옷엔 구멍이 나고, 운동화는 다시 더러워지겠지만 그럼에도 정돈된 일상을 위해 애쓰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내 안의 ‘다정함’, 이를테면, 누군가를 위한, 서툴게나마 ‘사랑’이라 불리는 것이 내 안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엄마’로 살다 보면 변함없는 일상을 견딜 수 없는 날이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복된 하루들이 쌓이면 숨이 막히고, 삶이 혐오스러워진다. ‘치사하고 더럽고 힘들어서 내가 오늘 사표 쓴다’라고 큰소리치는 직장인들처럼 말이라도 속 시원히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차마 그럴 수 없어 '치사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피곤하고 헛헛한 마음'을 홀로 씹어 삼킨다. 가끔은 내가 선택한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다. ‘모성’과는 한참  떨어진 곳,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 깊은 곳에서 종종 난 그런 생각들을 한다. 누군가의 배려나 이해로 삶을 지탱해야 하는 게 외롭고 힘겨워서,  아무도 모르는 안간힘으로 이를 악 물어야 버틸 수 있는 하루가 생각보다 많아서, 어쩌면 내가 너무 큰 실수를 저릴러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들. 부끄럽지만 그렇게 바닥을 치는 날들이 있다.       


약간의 이기심과 조금의 뻔뻔함 만으론 채워지지 않는 삶이 애달프고 서러운 건 나만의 문제라, 엄마의 자리를 헐어 빈 공간(내 자리)을 만들 때면 따라붙는 자책감이나 불안도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최인호 작가는 말했다. 글을 쓰려면 ‘선량한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엄마의 세계에서 선량함과 이기심이 만나 균열을 내지 않을 적정 선이 어디쯤인지 아직 난, 찾지 못했다. 선량한 이기주의자가 되기엔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아서일까? 자식이 하나, 혹은 둘이었다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모성에도 구체적인 매뉴얼이 있다면 좋겠다. 항목별로 점수가 매겨진 상세한 범위. 그럼 최소한 스스로 얼굴을 붉히거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적정선에 맞춰 요령껏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런 내게 계절의 변화는 의도치 않게 나를 일으켜 세우는 구심점이 된다.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게 만들고, 바쁘게 몸을 움직여 식구들의 을 살피면서 밀어두었던 내 안의 다정함과 사랑을 마주하게 한다. 남들만큼 크거나 빛나진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어떤 마음들을 내 안에서 꺼내 보여준다. 그런 날엔 건조한 마음에도 아늑하고 따뜻한 바람이 분다. 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선택한 삶을 돌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란 걸 깨닫는다. 그럼 막연하게나마 더 나아질 거란 기대, 다 잘될 거란 기분 좋은 상상에 빠진다(그게 무엇이든).

              

그런 마음으로 집안을 정리하다 보면 얼룩지고 헝클어졌던 지저분한 마음에도 잠시나마 평온이 찾아온다. 돌아서면 다시 어질러지고 마는 공간처럼 맥없이 흐트러질 마음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평온'에만 머무르려 노력한다. 찰나일지언정 그런 순간들을 많이 모아둬야 바닥을 치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돌보지 않은 일상이 쌓이면 삶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 가끔은 이렇게 선량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내 앞에 놓인 삶을 그러쥔다.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채우고, 소홀했던 것엔  마음을 기울이기 위함이다.


지금도 난, '선량한 이기주의자'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날 일으켜 세우는 힘은 이기적인 마음보다 선량함에 있다는 거다. 선량하고 다정한 마음, 사랑이라 불리는 것을 닮은 수많은 제스처들. 나는 언제나 그쯤 어딘가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계절을 핑계 삼아 기울어진 삶의 균형을 찾으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거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만큼 내가 선택한 삶도 지키고 싶은 마음. 그러니 때론 삶이 바닥을 치더라도, 될 수 있다면 선량함으로 조금 더 기울어진 삶을 살고 싶다. 넘어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언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일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기막힌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