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셋은 공부 열심히 하면 되고, 딸내미는 공부 잘하는 남자친구 만나 결혼 잘하면 되겠다. 하하하"
"저는 제가 똑똑해질 거라서 공부 잘하는 남자친구 필요 없어요."
"그래도 여자는 한계가 있어, 그러니 남자를 잘 만나야 해"
"..."
택시에서 내린 딸아이가 기사 아저씨 때문에 짜증이 난다며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화가 나서 아저씨 말에 반박하고 싶었는데, 보아하니 나이가 지긋하셔서 더 이야기하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참고 내렸다고 한다. 붙들고 있자니 정신건강에 해롭고, 그냥 지나치기엔 깊은 빡침을 불러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말들을 마주할 때마다 생각한다. '2012년생인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겠구나' 하고.
태양, 子 유모차 끄는 다정 아빠..."아내 민효린, 희생으로 날 잡아줘" 이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보게 된 오늘의 연예이슈 기사 제목이다. 나는, 4남매를 키우는 13년 동안 유아차를 끄는 다정한 엄마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도, 써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누구도 유아차를 끄는 엄마뒤에 다정한 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유아차 + 엄마)의 조합일 때 저런 문장은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유아차 + 아빠)의 조합에서는 어떻게 저런 말이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 저들의 안락함이나 행복을 폄하하고 싶은 건 아니다. 문제는, 육아에 동참하는 남성에게 씌어지는 감상적이고 다정한 베일이 정작 육아가 일상인 여성의 삶에 닿으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다. 심지어 유아차에 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아기를 하루종일 업고 다녀도 말이다. 엄마에게 육아는 여전히 너무나 당연한 일 이므로.
이렇게 돌봄과 육아의 현장에서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도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서사가 탄생하곤 한다.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간병비 보험 광고를 예로 들면 이렇다. 광고는, 부모님 간병비 부담이 남자에겐 직장생활에 대한 소홀함으로, 여자에겐 육아와 살림을 남편에게 맡겨야 하는 미안함에 대한 고민으로 그려진다. 그런 이유로 남성은 직장에서, 여성은 집안에서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다. 그때 성우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거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보험으로 미리 준비하자고.
이런 건 또 어떠한가?"비싸도 사요"... '3대 이모님' 모셔가는 요즘 신혼부부들.이건 맞벌이 부부가 늘어가는 요즘, 가사노동을 줄이는 가전제품이 신혼부부에게 인기라는 요지의 기사 제목이었다.
기울어진 목소리와, 기울어진 이미지들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오고 흘러간다. 가사노동의 최적화를 말하면서 보란 듯이 '이모님'이라는 여성적 은유를 가져다 쓰고, 초등학교 5학년인 여자아이에게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이 존재한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맴도는 이런 말들에 반기를 들면, 예민하고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그건 기울어진 말보다 나를 더 불편하고 외롭게 만든다. 그래서 쉽게 덤벼들지 못한다. 고작 하는 일 이라곤 어그러진 말을 그러모아 홀로 들여다보며 답답함에 입을 비죽거리는 것이 전부다. 혹은 침대에 누워 왜 아직도 이런 말들이 쓰이는지, 그런 말들이 무얼 향해 있는지, 어떻게 해석되고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혼자 생각한다. 그러다 피곤이 밀려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뾰족하게 올라온 마음 한 귀퉁이를 슬쩍 접어버리곤 한다. 불편하지만 혼자서는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마음을 핑계 삼아서.
국밥집에서 일을 하다 보면 혼자 국밥에 소주를 먹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혼술 하는 사람 열에 아홉은 모두가 남성이다. 식당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성인남자를 보는 건 시간에 상관없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들은 매일, 아무 때고 손님으로 등장하니까. 그러다 혼자 들어와 "소주 한 병 주세요"라고 말하는 성인 여성을 마주치면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그리곤 속으로 '멋있다'라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의 반응은 조금 다른데, 직장에서 혹은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흘리듯 말씀하신다. 남성일 땐 굳이 하지 않는 말이다. 얼마 전에는 점심에 성인여자 둘이 국밥에 맥주를 마셨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니 다 먹은 맥주병을 미리 치워달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손님의 말을 듣더니, "그래도 여자가 사람이 됐네"라고 작게 속삭였다.
기울어진 말이나, 일상의 장면을 마주할 때면 급격하게 피로가 밀려온다. 지방 소도시에서 부모님과 남편의 일을 도우며 주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내가, 차별의 언어나 상황을 인지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언제나 스스로의 무력함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일이 전부다. 그런 내가 성평등한 세상을 바라고 꿈꿔도 되는 건지 의문스러울 때도 있다. 그보단 혼술 하는 여자어른을 보며 했던 '멋있다'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거다. 이런 감정의 불균형은 나 또한 기울어진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싶어서...
오랜 시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누군가와 함께 일 때도 나만 느끼는 불균형 앞에선 더 그렇다. 그럴 때마다 옳은 방향이라 생각하고 잡고 있던 단단한 마음이 조금씩 용해되고 녹아 없어진다.
친구가 그랬다. 인간은 생물학적 성기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래서 오늘은 친구의 말을 몇 번이고 혼자 곱씹어 본다. 달라지는 건 없어도, 길은 잃지 말자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