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 평소엔 먹진 않던 불닭 볶음면을 먹는다. 정수기 물을 사용해 제대로 익지도 않은 면발에 시뻘건 소스를 올려 대충 휘적거리곤 후르륵후르륵. 콧등에 땀방울이 맺히고 얼굴엔 자잘한 붉은 반점이 올라오지만 찬밥을 넣어 남김없이 비벼 먹는다. 그리곤 속을 달래기 위해 맥주 한 캔과 책상서랍 속에 가득 채워둔 쿠쿠다스를 먹고 또 먹는다. 먹는 건 언제나 순식간이라 책상 위에 펼쳐둔 책은 겨우 한두 장 넘어가는 게 전부다.
배가 부르니 책은 조금만 쉬었다 다시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온라인 서점과 쇼핑몰을 들락거린다. 습관처럼 장바구니에 몇 권의 책을 담고 나면 쇼핑몰 페이지로 이동해 그동안 찜해 두었던 잡다한 물건들을 들여다본다. 사고 싶었던 청바지, 운동화, 작은 액세서리, 자연스러운 피부톤을 연출해 준다는 선크림 같은 것들. 알고리즘이 내게 추천해 주는 비슷한 상품들까지 둘러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긴다. 졸음이 밀려오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이까짓 거 사면서 뭘 그렇게 고민을 하나 싶어 충동적으로 결제 버튼을 누른다. 그다음엔 1.25배속으로 보는 넷플릭스. 반쯤 감은 눈으로 몇 번이나 휴대폰을 떨어뜨리면서도 완전히 잠들지 않으려 무거운 눈두덩이를 힘겹게 추켜올린다. 왜냐면, 나는 곧 일어나 이를 닦고, 세탁기에 있는 빨래를 꺼내 건조기를 돌리고, 읽던 책을 조금 더 본 후에 쓰고 있는 소설을 고치기로 마음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뜨면 휴대폰은 침대 옆에 떨어져 있고, 책상 위엔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책과 과자 부스러기, 열리지 않은 노트북이 놓여 있다. 그럼 난, '망했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자책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시작부터 엉망인 그런 하루는 이상하게도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며칠 혹은 보름까지도 이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방치하는 시간.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그러다 아이들 손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냉장고 문이나, 침대 밑에 굴러다니는 먼지, 싱크대나 화장실에 낀 물때를 보고 화들짝 놀라 정신없이 청소를 한다. 손톱이 깨지고, 온몸에 근육통이 올 때까지 정리하고 비우고 닦는다. 물건이 사라진 빈 공간을 휘 둘러보고, 사진도 찍어둔다. 휑덩그렁하지만 동시에 윤이나는 공간을 보고 있으면 약간의 만족감과 공허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문제는 나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인간인 나. 젖은 빨래를 털듯 한 번쯤은 뒤집어 잡고 탈탈 털어 해가 잘 드는 곳에 널어두고 싶은 마음이지만 나는 과연 턴다고 회생 가능한 인간이기는 한가??
누군가 그랬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계획된 것에 차질이 생기면 그걸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반면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변수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단다. 계획한 것만큼 완벽하게 실천하지는 못해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실천에 옮긴 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마구 요동쳤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밖에 못 사는구나' 싶은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며칠 전 친구와의 톡방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삶에 변수가 너무 많아. 변수의 주인공은늘 내가 아니고."이렇게 사는 게 과연 맞는 걸까?라는 질문까지 던지며 나름 심각한 마음으로 꺼낸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지지부진 자꾸만 엎어지고 뒤쳐지기만 하는 삶이 모두 다른 사람들의 탓인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어 스스로를 일으키고 삶을 끌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볼 때, 하릴없이 스크롤을 굴리며 손가락만 까딱 거리고 있을 때, 커피대신 맥주를 먹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갈 때, 얼굴에 올라온 주근깨나 하루하루 가닥수가 늘어나는 새치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현실에선 불가능한 탈주를 꿈꾸며 공상 속을 헤맬 때, 주어진 삶을 붙들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냐는 말이다.
그러니 사사로운 욕망과 바람들을 구석으로 밀어 넣는 건, 예측하지 못한 일상의 자잘한 변수 때문이 아니라, 그걸 핑계 삼아 쉽게 바닥나버리곤 하는 형편없는 내 안에 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거다. 마치 병증처럼 희망과 체념을 오가는 이상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삶을 탕진하게 만드는 무른 마음. 삶이 깎여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단박에 일어서지 못하는 구제불능의 정신력.
아이들이 어릴 때, 주말이면 혼자 가방을 챙겨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곤 했다. 넉넉한 간식과 약간의 놀거리, 비상약 따위를 챙겨 적당한 장소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은 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늘 거기까지였다.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와 함께 놀아주지 않았다. 그저 난, 돗자리나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선 안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때의 난, 아이들이 얼른 자라길 바랐다. 먹다 남은 음식을 스스로 정리하고, 더러워진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혼자 가거나,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오롯이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온전한 자유는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아이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면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밤낮없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나를 돌보고 싶었다.
헛된 꿈이었을까? 작고 연약했던 아이들은 씩씩하고 튼튼한 어린이와 청소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나는 삶의 변방에 서 있는 듯하다. 다시 또 나는, 그저 하루가 빨리 저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빈번하게.
해내지 못할, 자꾸만 실패하고 마는 바람만 가득 찬 내가 너무 밉다. 미워서 이런글을 쓴다. 진부한 방법이지만 이렇게라도 나를 비춰봐야 겨우 다시 설 수 있는 나라서, 오늘은 국밥집 주방에 앉아 이러고 있다.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