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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어쨌든 나는 사랑을 원해

by 고운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p70




게도 킨셀라 아저씨의 손을 닮은 순간이 여럿 있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어떤 것이 훅 하고 내 안에 들어왔던 순간. 하지만 그것이 내게 없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이란 걸 알아차릴 때마다 마음에 금이갔다. 그러다 어느 날 와르르하고 무너졌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마음 옆에서 여러 날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짧고 찬란했던 소녀의 여름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것들은 내 안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구멍 난 마음에 들어온 사랑의 유효기간이 어떤 날은 하루, 어떤 날은 반나절, 어떤 날은 찰나에 머물다 사라졌다. 사랑 때문에 일어서면 사랑 때문에 다시 주저앉았다.


싫었다. 나를 온전히 일으키지 못하는 사랑이. 그럴 거면 모르고 싶었다. 사랑 따윈 없다고 믿고 싶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것에 기댈수록 눈에 띄는 가난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난, 소녀처럼 내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했다. 원망했고, 분노했고, 절망했다. 다정하고 따뜻한 것으로도 덮어지지 않는 거칠고 모난 마음이, 윤기 없이 바싹 마른 삶이 너무 싫어서 스스로를 혐오했다.


그래. 내가 그러면 그렇지.

넘볼 걸 넘봐야지.

하면서.


그래서 처음엔 소녀가 가여웠다. 소녀의 마음을 물들인 킨셀라 부부의 다정함이 소녀의 삶을 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뜨겁고 찬란했던 여름과, 딛고 선 삶의 간극 사이에서 수 없이 깨질 소녀의 마음이 그려졌다. 책 표지 뒷면에 적힌 말처럼, 누군가에겐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픔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집으로 돌아간 소녀와 그 소녀에게 배인 찬란함을 바라보던 언니들을 마주 했을 땐, 턱 하고 숨이 막혔다. 다정하고 따듯한 것들을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가난한 마음 따윈 어디에도 없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럼에도 한 가지 좋았던 점은, 잠시나마 소녀의 마음을 채워준 다정함이 가족 밖에 존재했다는 거다. 그것이 꼭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사랑이 공평하게 주어지진 않지만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삶을 멈추지 않는다면, 또 한 번 찬란했던 여름처럼 소녀의 마음을 채워줄 순간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그런 나를 사랑하고 싶어 오랫동안 애쓰며 살았다. 사랑 따윈 믿지 않는다면서도 일어서고 싶을 때면 나를 스쳐간 사랑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것이 온전히 나를 채워주진 못해도 잔뜩 웅크린 등허리를 토닥여 일으켜 세워줄 정도의 힘은 주었다.


가난한 마음은 나를 자주 울게 했지만, 그만큼 ‘사랑’을 더 자주 생각하게 했다. 지금도 그렇다. 여전히 난, 가난한 마음 때문에 자주 다친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 하기 위해 애쓴다. 밝고 찬란한 것들을 오랜 시간 그리워하고 동경하면서 알았다. 어쨌든 내게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내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소녀의 여름도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부디 조금만 아프고 오래도록 찬란하기를. 소녀의 삶에 새겨진 짧은 여름이

소녀를 둘러싼 세상에 따뜻하고 다정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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