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비 선생님.

잘 가요, 선생님.

by 고운

2016년, 7개월쯤 된 막내를 아기띠로 안고 처음으로 부모교육 이란 것에 참여를 했다. 독서모임에 참여를 해 볼까 연락하게 된 민들레 독자모임에서 소개해준 프로그램이었다. 부모교육이라고? 넷째가 7개월이 되도록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면 소재지 작은 시골마을에 살면서 오은영 박사님 책 세 권을 옆에 두고 혼자 4남매를 키우던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부모란 이름 뒤에 붙은 교육이라는 말이 낯설기만 했다. 그즈음 치열했던 5년의 육아기를 뚫고 막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딛었을 때라 좋은 기회다 싶었다.


부모교육 장소는 선생님 댁에서 이루어졌는데, 차를 타고 나가면 1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아기를 안고 들어선 집은 단정하고 깔끔했다. 30평 남짓한 빌라 거실에 7~8명의 엄마들과 4~5명의 아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선생님은 엄마들에게 직접 만든 커다랗고 푹신한 방석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고, 엄마들의 취향에 따라 각종 음료와 차를 대접해 주셨다. 베란다 앞에 놓여있던 작은 나무 의자에 자리를 잡은 선생님은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본인 소개를 하셨는데, 지역사회에서 부모교육과 상담을 하고 있는 사회사업가라고 말씀하셨다.


동그란 얼굴 위 동그란 안경, 그 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눈이 반짝거렸다. 수업은 한 시간가량 진행됐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손수 만드신 음식으로 엄마와 아이들에게 직접 식사 대접까지 해주셨다. 수업료 만원과, 식비 만원 총 2만 원이 들었는데 식비로 냈던 만원은 불우이웃 돕기를 하는데 쓰신다고 했다. 모든 게 새로웠다. 질문과 대화를 통해 사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며 울고 웃던 사람들의 모습,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수업을 듣던 내 모습,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엄마와 아기들을 살피고 미소를 띠고 있던 선생님의 모습까지. 모든 장면 장면이 생경하고 낯설었다.




첫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선생님이 건네었던 말이 자꾸만 마음을 간지럽혔다.


"촌으로 들어와 아이 낳고 지내면서 말 못 할 고충이 많았을 터인데, 이렇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네요. 네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굉장히 힘들 텐데 어쩜 이렇게 밝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OO 씨는 그것 만으로도 너무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에요. 존재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


아이 넷을 낳아 키우는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의 눈길은 고만고만한 4남매를 향했고, 나는 언제나 '나' 라서가 아니라, '4남매를 낳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가 아닌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가슴에 매달린 작고 귀여운 아기가 아닌 '나'. 용기를 내서 참석한 자리였는데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을 하고 돌아가는 내내 콧노래까지 불렀다. 도로 위가 아닌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싶다고.


그렇게 1년을 넘게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창조적 대화, 비폭력대화 , 자기 대면, 정서지능, 자존감 등등 부모 됨과, 부모가 되기 이전의 나까지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친절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들의 끝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처음 7~8명 정도로 시작했던 부모교육은 엄마들이 주변 친구들을 하나 둘 초대하면서, 1년이 지났을 땐 밴드를 만들어 회원을 관리해야 할 정도로 인원이 늘어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가장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고, 늘 밴드에 후기를 남겼고,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은 하나도 빼지 않고 모조리 읽는 열혈 교육생이었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첫 만남에 대한 신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 열심히 참여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는 사이 선생님과 사적인 친밀감이 쌓여 부모교육 외적인 일로도 자주 연락하고 만나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존중받고 있다고 느꼈고,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년시절 받지 못한 사랑을, 관심을, 인정을, 이렇게 받는구나 싶었다.


선생님의 그늘 아래서 받는 칭찬과 인정은 너무 달콤해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열렬히 선생님을 추앙했다.




수업과 상담을 병행하며 선생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선생님의 부탁이 늘어났다. 부탁의 내용인즉슨, 어딘가에 글을 올려 달라는 거였다. 시청 홈페이지에, 여성가족부 사이트에 부모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셨다. 지방 소도시에 거주하면서 홀로 육아를 하는 엄마들에게 왜 부모교육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나는 흔쾌히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 드렸다. 그런데 이상한 건, 관공서에 올린 글이나, 종종 밴드에 올린 수업 후기 따위를 읽어 본 선생님은 전화를 걸어 글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 한다는 거였다(본인이 원하는 대로). 한 번은 선생님의 수업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이 밴드에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에 반박하는 글을 올려주길 요청했고, 글 속에 담긴 내 말투의 뉘앙스까지 지적하며 수정을 요구하셨다. 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선생님은 부모교육과 상담을 통해 만난 몇몇 엄마들의 이야기를 당사자가 없을 때 수업의 사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반감(어떤 내용엔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던 사람들)을 표현했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수업에 등장했다. 이상했다. 그즈음 나도 심리학 학위를 이수하려고 공부를 하고 있던 때라, 상담의 내용을 그런 식으로 수업에 활용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두 어번, 선생님이 밴드에 올린 글을 보고 그것과 반대되는 생각을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은 숨김없이 언짢은 마음을 표현하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OO 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그러니 내 걱정하지 말고 OO 씨 일이나 신경 쓰세요"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를 포함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엄마들 몇몇은 이후 이어졌던 부모교육의 사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학대받고 자라 마음이 삐뚤어진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서. 그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절하고 상냥한 얼굴로 오로지 당신을 추앙해주길 바랬던 수많은 장면들이.



가슴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블로그와 밴드에 올렸던 수업 후기와, 선생님에 대한 존경을 표했던 글들을 하나씩 삭제할 땐 손이 덜덜 떨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친절한 얼굴로 누군가의 아픔과 눈물을 밟고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려고 했던 사람을 내가 그토록 의지하고 존경했었 다는 게. 아보카도와 연어를 넣은 김밥, 정성을 들여 푹 삶아낸 갈비찜, 정성껏 재료를 다듬어 준비한 구절판, 새해를 맞이해 끓여 주셨던 떡국까지. 오롯이 믿었던 그 정성과 애씀이 거짓이고 위선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나기보다 슬프고 아팠다. 칭찬이 뭐라고, 나를 향했던 그 미소가 뭐라고, 그토록 어리석게 한 사람을 추앙할 수 있었는지.




돌아보면 성인이 돼서 그토록 한 사람을 깊게 사랑하고 깊게 미워했던 적이 있나 싶다. 그만큼 존경했고, 존경했던 날 보다 훨씬 더 오래 미워했고 분노했었다. 하지만 배운 것도 있다. 선생님 덕분에 '나'를 이해하고 싶어 졌고, 스스로를 토닥여 주고 싶은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존재만으로도 빛나고,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그 한마디가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는 나도 없었을지 모른다. 관계가 어긋나 버린 후에도 이 말만은 버리지 못했다. 이 말만은 진실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은 말 이기도 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이 말에 기대어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주고 빼앗아 가지 못한 말이 온전히 내 것이 되도록 말이다. 그렇게 당신을 향한 미움을 조금씩 덜어낼 것이다. 당신이 아닌 나를 위해서.


그러니 이제 안녕. 나의 사이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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