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 모든 순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서른여덟, 네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내게 ‘사랑’은 내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주제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부모 됨을 돌아보게 만드는 아이들의 행동 앞에 나는 수없이 아이를 향한 내 사랑의 형태를 관찰하게 된다. 하지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네게 최고의 엄마가 되어줄게’라고 했던 가슴속 다짐에 비하면 지금의 내 모습이 은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설이>를 읽고 난 뒤에는 더 그랬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난 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설이를 향한 이모의 사랑, 나는 한 번이라도 그 뜨거운 것을 아이들에게 준 적이 있던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할 틈도 없이 다른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복잡한 조건법 시제 따윈 없이 나는 그렇게 사랑받았다’라고 했던 설이의 덤덤한 고백이 가슴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시작된 삶이지만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설이가 부러웠다. 상처투성이 삶이지만 그 조차도 온전히 껴안고 두발로 당당히 선 설이의 삶에 질투가 났다.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 치며 살았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밀려와 나를 흔들었다. 내게도 그런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설이가 그랬듯 이미 지나가 버린 삶에 의미 없는 덧셈과 뺄셈을 무한히 반복하게 만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열세 살 설이는 더 이상 하지 않는 일을 서른여덟의 내가 하고 있다는 것. 나는 갑자기 몸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맥없이 푹 퍼져 버렸다. 그렇게 ‘설이’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 며칠을 끙끙 앓았다.
어느 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첫째가 와서 내게 물었다. “엄마, 그 책 재미있어?”나는 별생각 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자기도 읽어 보겠다며 ‘설이’를 들고나갔다.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아이가 내게 오더니 무심코 던진 말에 머리가 띵 하니 울렸다. “엄마. 이 책은 너무 비현실적이야.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 뭘 해도 다 받아주고, 애들은 원래 그런 거라고, 그렇게 크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는데?”
아이는 설이 이모의 모습이, 그 뜨겁고 깊은 사랑이 낯설었나 보다. 읽다 만 책을 툭 던져두고 무심하게 뒤돌아 나갔다. 대체 ‘부모의 사랑’이 뭐 길래 서른여덟의 나는 아직도 사랑에 목말라하고, 초등학교 5학년인 첫째 아이는 그런 사랑이 없다고 하는 걸까.
통백식당 이모의 사랑은 정말 소설 속에나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원하고, 또 나의 아이들에게 주고 싶던 그 사랑은 정말 비현실적인 걸까? 나는 다시 한번 설이의 삶을 쫓아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곽은태 선생님의 어깨가 설이 앞에서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추궁하는 설이 앞에 곽은태 선생님은 짐승 소리를 내며 절규했다. 나도 함께 울었다. 보육원 아이들과, 사랑만 빼고 평생 동안 모든 것을 주고받았던 원장님의 삶이 곽은태 선생님의 삶과 겹쳐졌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기대어 베푸는 사랑, 그럼에도 그것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 한 사람의 시간(삶)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반석 같던 곽은태 선생님의 어깨가 한없이 흔들렸던 것처럼, 살아가는 순간순간 내 부모님의 어깨도 그렇게 흔들렸을까? 보육원 원장이 설이 때문에 설이에게 화를 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나를 향했던 부모님의 질책과 비난도 나 때문만은 아니었을까? 나는 대답 없는 질문을 타고 나의 유년시절로 돌아가 본다. 상처받고 상처 주며 보냈던 부모님과의 시간들.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난폭한 시간들 사이에 서서 부모님의 삶을 굽어본다. 설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실은 부모님의 어깨 위도 알고 보면 멀미 나게 흔들리는 곳이었다고(p270)', ‘사람들은 종종 화를 내지만, 그 이유가 실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고(p172)’...
네 아이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려 본다. 첫째라서 특별한 아이 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서 애틋한 사랑, 사랑스러운 개구쟁이 셋째 현이, 귀염둥이 막내 혁이 까지. 천천히 아이들을 향했던 내 사랑의 형태를 그려본다. 후회와 절망, 실망과 자책,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슬픔의 감정들 틈에서 아닌 척, 씩씩한 척,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가 서 있다. 나는 그렇게 메마른 가슴에서 쥐어짠 사랑을 아이들에게 주고 있었다. 늘 부모님과 함께 했지만 그래서 더 지독하게 외로움을 느꼈던 나처럼, 우리 아이들도 외롭진 않았을까?...
‘최고의 엄마’가 되어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다섯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은 그저 본능적으로 나오는 감정일 뿐 무엇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못했으니까.
나는 다시 한번 책장을 넘기며 설이 이모의 삶을 쫓는다. 설이의 삶에 깊이 녹아있는 그 뜨거운 것을 찾아, 스스로 다짐했던 ‘최고의 엄마’를 좀 더 선명하게 그려보려고.
부디, 우리 아이들의 작은 어깨가 말없이 흔들리지 않기를, 반짝이는 눈동자가 불안에 떨리지 않기를, 투명한 마음에 그늘이 일지 않기를 바라며, 설이 이모가 그랬듯 무심하지만 ‘달콤한 확신과 흔들림 없는 터전'으로 그렇게 아이들 곁에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