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닿기 까지.
살아있다는 고통
스물둘, 재수를 해서 겨우 들어간 대학을 반학기 만에 때려치웠다. 사실 처음부터 대학 같은 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어서 매일 학원에 나갔고 그러다 보니 대학생이 됐다. 학교가 경기도 외곽이라 매일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1시간 50분이 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왕복했다. 평택으로 가는 1호선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 구로에서 내려 뛰어갈 때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함께 뛰고 있으면 왜 뛰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뛰고 있는 두 발이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그게 싫어 도서관이나 PC방, 지하상가에 있는 중고서점을 하릴없이 배회하다 부모님 몰래 자퇴서를 냈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될 수 있다면 아주 멀리,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두려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혹여나 그들이 불안한 내 얼굴에서 지나온 내 시간을 보게 될까 숨고만 싶었다.
적당한 핑계가 필요했다. 나를 숨길 수 있고 그럼에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그래서 노량진으로 갔다. 표면적으로 나마 공시생이 되었고 친구들과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하지만 공시생이 된 이상 공부를 해야 하니 다시 또 목적 없이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했다. 현관문을 닫고 나서면 극에 달한 불안이 반사적으로 턱 끝을 잡아당겼다. mp3의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 발끝만 보고 걸었다. 더는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을 견딜 수 없게 됐을 땐 두 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면 손잡이를 잡고 서있던 내가 낯선 이의 어깨에 기대 늘어져 있었다. 결국 고시원은 절대 안 된 다들 아버지를 설득해 학원 근처에 2평 남짓한 작은 방을 얻었다. 책상과 매트리스만 덩그러니 놓인 직사각형의 작은 방, 누렇게 때가 탄 차가운 벽에 기대앉았을 땐 슬픔과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을 것 같아 슬펐고, 숨어서라도 고개를 들어 숨 쉴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캄캄한 밤이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러 가서도 계산대에 사람이 있으면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 아무도 없을 때 계산을 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세상이 온통 썼다. 화창한 날 내리쬐는 햇빛도, 한 여름 시원한 바람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먹던 밥도, 꽁꽁 숨어버린 나를 걱정해 주던 친구들의 문자 메시지도, 밤이면 고시원 지붕에서 교태를 부리던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도, 겨드랑이에 독서대를 낀 채 손바닥에 붙인 형형색색 포스트잇에 얼굴을 처박고 다니던 수많은 익명의 발소리도, 컵라면 하나 사러 나갈 용기가 없어 믹스커피 몇 개로 허기를 채우던 날과 버티고 버티다 주룩 흘리고 만 눈물도 온통 다 쓴맛이었다. 살아 있다는 게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농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피해 도망쳐 왔으면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고, 매일 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말로 사라질까 겁이 났다. 삶에 부적격자가 되고 말았다는 절망과 수치심이 온통 나를 뒤덮었다. 혼자 있을 때조차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끔찍했다. 사는 게, 살아 있다는 게.
살기 위한 용기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내가 저지른 수많은 실패와 오류가 인생이 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고시생이 모인 카페에 함께 점심을 먹을 친구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고, 춘천에서 올라왔다는 H를 알게 됐다. 작은 키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던 H는 약속 장소에 서 있는 날 발견하곤 손을 흔들며 뛰어 왔다. 그 모습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H는 사람들 틈에서 자꾸만 붉어지는 얼굴과 움츠려 드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함께 수업을 듣고, 함께 걷고, 함께 밥을 먹으며 말없이 곁을 내주었다. 늦은 밤까지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학원 근처에 있던 DVD방에 들어가 영화를 한편 보거나 노래방에 가서 힘껏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무얼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진 못했지만 캄캄한 방 안에 숨어 지내는 일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각오를 다지지 않아도 고시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됐고, 두 번의 시험을 봤고, 매일 얼굴을 마주치던 몇몇의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도 나눌 수 있게 됐다. 물론 시험에서는 떨어졌지만 크게 절망하진 않았다. 누군가의 눈엔 엉망진창으로 보일 삶이겠지만 애써 살아내길 선택한 내겐 최선의 삶이었다.
그렇게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몇 발 뒤로 물러섰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한 눈에 봐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외모, 말투, 행동 모든 것이 정돈된 단정한 사람.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다니던 서른 살의 남자였다. 공시생 가면을 쓰고 무릎이 튀어나온 운동복 차림에 불안한 얼굴로 담배를 피워대는 나와는 어울릴 수도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 그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고향 친구들과 노량진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 예예 그렇군요…….” 거리를 두고 몇 번을 밀어내도 그는 퇴근길에 꼭 고시원에 들러 공허한 담배연기를 내뿜던 내 얼굴을 보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표정이 없을 때도 웃음이 배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나도 그렇게 웃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사는 세상이 궁금했다. 그가 머무르는 자리, 만나는 사람들, 지하철을 타고 오가며 하는 생각, 이미 지나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
그를 만나고 몇 달 뒤 노량진을 떠나 집으로 들어갔다. 여행사와 건강보조 식품을 만드는 회사의 텔레마케터로 일하며 2년간 그와 연애를 했고, 스물일곱이 되던 해에 결혼했다. 아내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여전히 이유 없는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날이 있었지만 불우했던 원가정과 실패로 얼룩진 곳에서 멀어졌다는 것만으로 많은 시간 평온할 수 있었다. 잘 먹었고, 잘 잤고, 자주 웃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삶에 취해 행복만을 보았다.
엄마와 아내, 며느리로 살아가는 내가 할 수 있고, 하면 좋고,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덕에 육아와 살림에 있어선 자타공인 고수가 되었다.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난 행복에 취한 게 아니라 음습하고 눅눅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될까 무서워 정신없는 삶에 취해 있었다는 걸.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망가서도 안 되고 도망갈 수도 없는 내가 보였다. 나는 네 아이의 엄마였다.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난 어떤 사람이야?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게 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너무 이상하지 않아?” 질문은 했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내가 좋다고 쫓아다니더니 나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못하는 남편이라니. 그가 말한 사랑이 거짓이고 위선처럼 느껴졌다. 남편을 쏘아보고 방으로 들어와 앉으니 잘 정돈된 그의 삶에 기대 구원받고 싶었던 오래전 마음이 떠올랐다. 불에 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제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없어 ‘결혼’이라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클리셰를 통해 행복을 꿈꿨던 거다. 내게 상처를 준 건 남편이 아니라 나였다. 멋대로 그의 삶을 상상하고 그 안으로 도망가고 싶었던 나. 환상에 빠진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행복만을 꿈꾸던 멍청한 나.
남편의 대답을 듣지 못한 건 그의 사랑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었다. 남편이 아닌 내게 물었어야 했다. 그건 처음부터 내 것이었고, 나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나를 드러낼 용기
어른 흉내를 내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남편 앞에선 괜찮은 척, 아는 척, 강한 척, 잘 살고 있는 척, 그동안 애써 해오던 수많은 ‘척’들을 내려놓기로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에게 어린 시절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왜 지금도 아버지 앞에 서면 자꾸만 쪼그라드는지, 왜 자꾸만 엄마에게 화를 내게 되는지, 왜 서른셋이나 된 이후에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로 당신을 당황하게 해야만 했는지, 혼자서 통과해야 했던 외롭고 쓸쓸했던 시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 앞에 꺼내 놓았다.
어떤 날은 잠자리에 들기 전 캄캄한 방 안에서, 어떤 날은 그의 허리를 밟으면서, 어떤 날은 웹툰을 보며 킥킥대는 남편의 시간을 방해하면서, 또 어떤 날은 마주 보고 앉아 신나게 술잔을 부딪치면서 이야기했다. 남편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귀 기울여 들어주고, 두툼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아 주기도 했다. 물론 어떤 날은 졸기도 하고 귀찮다는 듯 딴짓을 하기도 했지만 크게 서운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말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로받고 있다고 느꼈다.
아이들 때문에 TV를 없앤 후부터 우리의 대화는 더 길어졌다. 각자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거실 바닥에 누워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불속을 뒹굴 거리면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다. 점심은 무얼 먹었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소소한 일상을 나누다 보니 좀처럼 자기 얘기는 하지 않던 남편도 가끔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롤러코스터 같았던 내 삶과 비교하면 대체로 평탄한 시절을 보냈지만 평탄함 속에도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누구나 온전히 메워지지 않는 빈틈 몇 개 정도는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과 누구든 얼마만큼은 부끄러운 사람이란 걸.
습관처럼 쌓인 많은 대화들 덕에 우리는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해졌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어느 타이밍에서 한 발 물러서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자연스레 서로를 배워갔다.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사실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야. 구김 없이 잘 정돈된 것 같은 당신의 삶이 좋았어. 당신 옆에 있으면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랬구나. 괜찮아. 당신은 여전히 예쁘니까. 사실 난 예쁜 여자랑 살고 싶었어.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래, 다 괜찮다. 이유야 어찌 됐건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웃을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작지만 빛나는 순간에 기대어
평탄치 않은 길을 오래도록 걸어왔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끝없는 불안과 우울에 오래도록 나를 내버려 두었다. 너무 빨리 불행을 경험한 탓에 사는 게 늘 고단하고 쓸쓸했다. 일찍부터 죽음을 생각했고 많은 밤 고통 없이 사라지게 해 달라는 소망을 품고서야 잠이 들었다. 매 순간이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숨고 도망가고 후회다고 다시 또 숨어버리던 삶의 궤적을 어른이 되어서도 버리지 못했었다.
불행이 너무 깊어 오히려 완벽한 행복을 꿈꿨던 걸까? 매일매일 반짝이지 못할 거면 차라리 어둠에 익숙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단정 지으며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돌아보면 어떤 순간에도 완벽히 혼자는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도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던 할머니가 계셨고, 진로를 함께 고민해주던 선생님, 멋대로 잠수를 타고 연락을 끊는 내게 욕을 하면서도 다시 웃으며 손을 내밀 던 친구, 자퇴서를 내고 돌아선 나를 오래도록 붙들고 설득하던 선배도 있었다. 다만 그때의 난, 내 안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급급해 그들의 손을 잡을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매일 저녁 둘째 하원(피아노) 시간에 맞춰 남편과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아파트 후문에 있는 고용노동부를 지나 새마을 마트, 카센터, 건강원을 거쳐 횡단보도를 건너면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이 있다.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하원 시간이 늦고 차량 운행을 하지 않아 매일 데리러 간다. 남편의 손을 잡고 걷는 짧은 시간은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살아 냈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행복하다.
물론 여전히 춥고 외로운 날이 있다. 햇볕에 잘 말려 두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다시 곪아 터지는 날도 있고, 잘 지내다가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매일 저녁이면 남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과, 작고 굽은 등에 아기를 엎어 재우는 할머니, 요란한 방울 소리를 내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 교복을 입은 다정한 어린 연인들을 스치고 지나가면 학원 문을 열자마자 양손을 위로 뻗어 힘차게 인사를 하며 달려오는 아이를 만난다. 또 한 번 행복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살아간다. 복잡하게 뒤엉킨 삶 속에서 작지만 빛나는 순간들에 기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