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간을 훔쳐오고 싶었다.

물안갯 속의 그녀.

by 고운

아이들과 함께 이른 휴가를 떠났다. 여름이면 농사일로 바쁜 남편 때문에 가족이 다 같이 가는 휴가는 언제나 7월 초쯤이다. 장소는 한적한 곳 이어야 한다.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려면 출발 전부터 에너지를 잘 비축해 둬야 하는데 사람이 붐비는 곳에 가면 도착과 동시에 에너지가 빠르게 소진되고 만다. 사실, 한 차에 네 명의 아이들을 태우고 한 시간 이상의 거리를 나선다는 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모든 에너지가 바닥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때문에.


“오빠야, 쩝쩝 소리 좀 내지 말래?”

“엄마, 오빠가 계속 쩝쩝거려요.”

“엄마, 00 이가 코딱지 파서 차에 발랐어요.”

“엄마, 누나가 자꾸 양반다리 하면서 밀어요”


초등학생 네 명의 대화는 언제나 극으로 치닿는다. 별거 아닌 걸로 잡아먹겠다고 달려들고, 갑자기 좋아 죽겠다고 엄청 시끄럽게 웃는다. 방금 코딱지를 판다고 더럽다고 했으면서 그 손으로 나눠주는 젤리를 받아먹고, 하나만 달랬는데 두 개를 주면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니까. 귀엽지만 소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티키타카로 정신을 쏙 빼놓는 아이들이다.


그러니 사람이 붐비는 곳에 가면 나는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요번 휴가도 최대한 가깝고, 인적이 드문 곳을 택했다. 그렇게 차로 한 시간 반 가량을 달려 도착한 바닷가는 눈 부시게 빛나는 자태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넓은 모래사장 위에 타프를 치고 앉으니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저녁을 먹고 민박집 앞 해변가로 나왔을 땐 물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었다. 습하고 끈적한 바람에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을 정도였지만 물안개 너머로 깜박이는 등대와 잔잔한 파도소리, 인적 없는 해변가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장면을 만들어 주었다. 꿈속을 걷는 듯 몽롱함에 취해 남편의 손을 잡고 한 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때 보았다. 텅 빈 주차장에 세워진 차 한 대와 캠핑용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여자를.


한쪽 다리를 반대편 허벅지 위에 올리고 앉아 습한 어둠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홀로 바다를 바라보던 여자. 민박집 앞을 몇 번을 돌고 돌 때까지 여자는 그 자세 그대로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어두운 밤, 끈적한 바다의 습기 속에 덩그러니.


순간, 그녀가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덩그러니 놓이고 싶었다. 남편의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것도 좋지만, 할 수 있다면 저렇게 홀로 검은 파도가 치는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니라 온전히 혼자서, 바다와 나 둘만 존재하는 그런 시간 속에 머물 수 있는 사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물안개 속에서 만난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홀로, 그것도 캄캄한 밤에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그토록 오래 바다를 바라보았을까. 끈적한 물안개가 그녀에겐 어떤 느낌이었을까. 무섭지는 않았을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던 그녀와 나의 시간은 분명 달랐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안개가 춤추던 밤바다가 내겐 꿈을 꾸듯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면, 그녀에겐 한 순간이 아닌 영원한 밤의 시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매 순간이, 하루하루가 헤어짐과 망각의 연속이다. 붙잡고 싶은 것들이 있어도 놓아야 하고, 머물고 싶은 순간이 있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가고 싶은 나를 설명할 길이 없어 아쉬움과 답답함은 언제나 혼자만의 몫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 인지만 때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 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만드는 날이 있다. 하지만 시간은, 삶은, 언제나 그랬듯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렇게 스르륵 흘려버린 시간들이 하나 둘 가슴에 쌓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라곤 아이들과 남편이 빠져나간 집 안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눈물의 진짜 이유는 모르겠는 날이 더 많다. 그래서 우나보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울고 있는 내가 너무 우스워서, 차라리 울어버리자 하고.


나를 놓아버리는 것은 싫다고 악을 쓰면서도 정작 놓아버릴 수 없는 나는 누구인지 모르겠고, 잘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잘 사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신변잡기 같은 글을 쓰겠다고 설거지며 빨래는 미뤄두고 앉아, 커서가 깜박이는 빈 화면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나는 왜 이러고 있는지도.


이를 악 물고 애써봐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시간 앞에선 언제나 속수무책이다. 오늘을 밀어낼 내일이 오기 전에 무어라도 하고 싶은데, 당장 눈앞엔 내 손이 닿아야만 하는 집안일이며, 처리해야 할 아이들의 일이 산더미처럼 놓여있다. 아쉽지만 오늘도 난, 이렇게 내게 주어진 하루와 이별을 해야만 한다. 놓아버려야 하는 시간이 또 하루 늘었다.

물안개 속에 홀로 앉아 있던 그녀의 시간을 훔쳐 오고 싶다. 그녀의 시간을 훔쳐 헤어지지 않아도 될 끈적한 하루를 내게도 선물해 주고 싶다. 아침이 오면 달아나 버릴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 시간도 밀어내지 못할,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시간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난,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조금 더 살다 보면 오게 될 그날이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라며 아이를 데리러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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