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누구도 완전하게 정의할 수 없는 말.
오래된 기억
스물다섯. 여행사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된 언니 K는 기혼자였고 당시 10살 미만의 두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K는 퇴근 후 종종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뭐해?”
“그냥 침대에 누워 쉬고 있어요.”
“아, 부럽다.”
전화기 너머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아이 봐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많이 우는데...”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냥 베란다로 확 던져버리고 싶어.”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이를 베란다로 던져 버리고 싶다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기 전까지 K는 퇴근 후 내게 계속 전화를 걸었고, 아이와 남편을 증오하는 말을 수 없이 쏟아 냈다. 힘들다고 했다. 남편의 무관심과 경제적 어려움, 두 아이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길게는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K의 이야기는 지루했고 동시에 무서웠다. 난 K가 진짜 아이를 베란다로 던져 버릴까 봐, 어느 날 뉴스에서 K를 보게 될까 겁이 났다. K의 아이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키에 단단한 몸을 가진 콜센터 팀장 P는 매일 짧은 핫팬츠를 입고 출근을 했다. 당시 건물 복도에 흡연 구역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에 갈 때마다 P를 보았다. 한 날은 P가 상하의를 합쳐도 내 바지 하나 못 만들 것 같은 옷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아이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날 P가 엄마였다는 걸 처음 알았다. 놀랐다. 매일 아침 지각을 하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짧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화장이 지나치게 짙은 사람, 그날도 난 P의 아이를 걱정했다.
스물다섯의 난 K와 P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엄마,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우는 골초 엄마는 정상 범주를 벗어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K와 P의 엄마 됨을 의심하거나, 그들의 삶을 염려하는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K의 절망을 지루해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두려워했던 나를, P의 겉모습만 보고 혀를 찼던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엄마가 되고 알았다. 돌봄의 최전선에서 P와 K가 경험해야 했을 지난한 삶을. 늦은 밤 명멸하다 사라져 버릴 것 만 같은 나를 붙들고 울다가도 아침이면 또다시 부지런히 엄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낮과 밤을 통과하고 나서야 보였다. 아이를 던져 버리고 싶다는 K의 말 뒤에 아이를 사랑하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다는 걸.
오, 프랭클린!
영화를 보고 원작 소설을 읽으며 프랭클린의 태도가 한없이 거슬려 마음에서 분노가 일었다. 좋은 아빠, 가족 피크닉, 아이의 웃음소리, 잠자리에서 읽어주는 이야기 책, 바람에 빛나는 아이의 머리칼처럼 매 순간 반짝 이는 행복으로 점철된 ‘정상가족’이라는 ‘허구’를 맹신하는 남자. 다정한 척, 분별력 있는 척, 에바를 가르치려 드는 프랭클린의 태도가 눈에 가시처럼 불편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신념(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에바와 케빈을 산채로 봉인했다. 케빈에겐 다정한 아빠로, 에바에겐 분별력 있는 남편의 권위로 자신이 포장해 놓은 반짝이는 상자 안에 그들의 삶을 밀어 넣었다. 프랭클린은 정말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을까? 정말???
에바의 등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프랭클린, 너무도 뻔뻔하게 우린 모두 애쓰고 있다고 말하는 프랭클린, 케빈을 ‘내 아들’이라 부르는 프랭클린(프랭클린은 에바가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우리 아들’이라 부르던 케빈의 호칭을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에바가 느꼈을 소외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에바의 고통과 외로움을 엄마의 당연함으로 분쇄해버린 플랭클린.
만약 이 영화 속에 괴물이 있다면 그건 살인을 저지른 케빈도, 케빈을 향해 네가 태어나기 전이 훨씬 더 행복했다고 말한 에바도 아니다. 괴물은 °젖병을 빠는 노인처럼(김려령/트렁크) 순진한 척 행복한 가족이라는 허구를 향해 소리 없이 노련하게 자신의 열망을 뿜어낸 프랭클린이다. 케빈은 알고 있었다(물론 에바도). 프랭클린이 사랑한 아이는 자신이 아니라 그의 상상 안에서 만들어진 행복한 시절 어떤 아이라는 것을. <케빈에 대하여/라이오넬 슈라이버 p.543>
모성이라는 굴레
수 클리 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으며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그녀가 끊임없이 ‘나는 미친 엄마가 아니다’라고 자신의 ‘정상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 이야기는 한편으론 가슴이 아프면서 동시에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수의 아들 딜런과 함께 살인을 저지른 에릭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만약 나의 아이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에바처럼 도망가지 않을 수 있을까? 수 클리볼드처럼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아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낼 수 있을까? 무엇하나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상황에서 나를 가장 괴롭히게 될 것은 목숨을 잃은 수많은 아이들이나 희생자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절망과 슬픔보다 내가 가진 ‘엄마’라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부모상담’을 했던 때가 기억난다. 선생님이 본 아이의 모습은 어떨지, 내가 염려하는 부분들을 선생님도 보셨을지 궁금했다. 그날 나는 선생님 앞에서 울었다. 첫 아이가 여섯 살 되던 해부터 가정양육을 하며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었는데,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은 아이의 마음이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미안했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면에는 아이의 태도를 통해 엄마인 나도 함께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특히 첫째, 둘째, 셋째의 1학년 담임( 3년 내 같은 분이 1학년을 맡았다) 선생님을 볼 때면 마치 ‘나는 너의 엄마 됨을 알고 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들리는 것만 같아 마음 한편이 저릿하다.
나의 첫 부모상담 때의 긴장, 출산의 순간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세상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겠다던 에바의 다짐, 에릭의 사이코패스 성향과 딜런을 향했던 자신의 사랑을 설명해야만 했던 수 클리 볼드의 말은 형태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곳을 향해 있다. ‘위대하고 강한 모성의 깃발’ 아래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는 세상의 모든 엄마.
'최고' 보다 그냥 '엄마'
첫 아이를 낳던 날, 가슴에 올려진 아이를 보고 ‘네게 최고의 엄마가 되어줄게’라는 다짐을 했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순간 이미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엄마가 아닌 ‘최고’가 무엇일까 에만 집중했다. 아이가 젖을 빨 때 느껴지는 묘한 떨림과 신체적 반응은 내게 탑재된 모성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각기 다른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매번 다른 엄마가 된다. 한 순간도 같은 모습 인적이 없다. 모성이라 불리는 아이를 향한 사랑은 종잡을 수 없이 들쭉날쭉이다. 어떤 날은 흘러넘치지만 어떤 날은 겨우겨우 긁어모아야 한다. 처음부터 가슴에 탑재된 ‘모성’ 따윈 없었다는 얘기다.
나는 매일 밤 아이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 주지도 않고, 주말이면 멋진 도시락을 싸서 피크닉을 가지도 않는다. 스포츠에는 무지해서 첫째, 셋째와 야구,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떠들 깜냥도 되지 못한다. 게다가 우아하거나 품위 있지도 않다. 그래서 자꾸만 주걱을 들고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엄마다. 하지만 특별하거나 반짝이지 않은 이런 내 모습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프랭클린이 보면 뒤로 자빠지겠지만...) 어쩌면 나의 ‘엄마 됨’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보면 함량 미달일지도 모르겠으나 상관없다. 경직된 신념에 갇힌 숨 막히는 사랑보다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견디고(엎치락뒤치락) 애쓰며 만드는 사랑이 더 단단하다고 믿으니까. 난 ‘최고’가 아닌 ‘엄마’가 되려고 애쓸 뿐이다.
프랭클린의 ‘정상가족 신화’, 사회가 만들어낸 ‘모성신화’에 갇힌 에바의 삶이 아직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딜런을 통해 아이를 향한 수의 애착과 사랑을 가늠하려 드는 사람들의 시선도. 양육에 있어 엄마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감히 닿을 수 없는 잣대로 모성을 평가하고 저울질하는 세상은 이토록 끔찍하다.
“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케빈이 했던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모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 그 위대하고 강한 것에 대한 가장 솔직한 말. 누구도 완전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말.
케빈을 안아주던 에바의 단단한 마음으로 수 클리볼드를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