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보고 싶다 친구야.

by 고운

1996년 3월, 영화 속 주인공 안생과 칠월처럼 나도 운명 같은 친구를 만났다. 지금도 기억한다. 빼빼 마른 몸에 청바지를 입고 뒤로 한껏 당겨 묶은 머리를 한채 해사하게 웃던 친구의 얼굴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친구를 처음 본 날부터 난 그 아이를 사랑했던 것 같다. 평생을 함께 할 거라 믿었다. 어떤 순간이 와도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좋아해서 마음을 내어 준 다는 게 무엇인지 몰라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수백 번 사랑고백을 했다. ‘나는 네가 너무 좋아, 사랑해’라고. 그리고 내가 고백한 마음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나를 보고 웃는 친구의 얼굴, 맑은 눈빛, 어딜 가나 놓질 않았던 따뜻했던 손의 온기만으로 언제나 내 마음이 가득 찼으니까. 친구와 헤어지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게 돼서야 알았다. 친구가 나에게 준 것이 얼마나 커다란 사랑이었는지.


나는 매일 아침 친구의 집에 들러 친구의 머리를 직접 빗어 주었다. 친구는 내가 올 때까지 머리를 묶지 않고 기다렸다. 하루는 늦잠을 자서 헐레벌떡 친구의 집으로 갔는데, 머리를 풀어헤친 친구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었다. 꼭 내가 묶어 줘야 한다고 준비를 하지 않고 버틴 거다. 난 그날도 친구의 머리를 묶어주고 손을 잡고 친구의 집을 나왔다.


우린 소풍날이면 똑같은 옷을 사서 입었고, 매일매일 편지와 일기를 주고받았다. 한 사람이 당번인 날엔 늘 같이 청소를 하고 급식을 나르고 주전자에 물을 채워 넣었다. 신승훈과 엄정화 솔리드의 노래를 함께 듣고, 어떤 날을 감정에 취해 엉엉 울기도 했다. 둘 다 키가 큰 편 이어서 매일 뒷자리에 앉았는데, 책상과 의자를 화장실 구석에 숨기고 친구네 집에서 놀다 종례 시간에 슬쩍 들어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같이 비를 맞고, 주말이면 퐁퐁(방방?)을 타러 갔다. 그때도 우리는 손을 잡고 뛰었다. 점프를 할 때마다 가볍게 치솟는 서로의 몸을 보면서 지칠 때까지 웃었다. 하루는 점프를 하는 순간 동네가 일순간 정전이 되었다. 해거름이 질 무렵, 어둠에 묻혀 위로 붕 떴는데 친구와 나 둘 뿐인 것 같은 찰나의 순간에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지금도 그날이, 그때의 시간이 내 안에 살아있다.



늘 함께 하자고 했던 우리의 약속은 서로 다른 중학교를 배정받으면서 깨졌다. 졸업식, 키만 껑충했던 우리는 서로의 어설픈 단발머리를 보며 매일매일 전화하기로, 주말엔 꼭 만나기로,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 등등 지킬 수 없는 많은 약속을 하고 울면서 헤어졌다. 친했던 친구들 중 홀로 다른 학교를 배정받았던 나는 학교에 적응하고 새 친구를 사귀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일매일 하던 친구와의 통화는 이틀에서 삼일, 일주일, 열흘, 조금씩 텀이 길어졌다.


그 사이 집안이 형편없이 어려워져 여러 번 이사를 다녔고,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끝 모를 방황을 시작했다. 죽을 용기는 없지만 살고 싶지는 않아서, 도망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어서 길거리에 나를 버려두었다. 그때의 난, 이미 열세 살의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번 도 꿈꿔 본 적 없던 모습, 세상에 대한 적의와 사람에 대한 불신, 부모에 대한 원망이 뒤섞여 처참하기 이를 대 없는 몰골이었다.


용돈을 모아 친구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열네 살 여름방학 함께 기차와 버스를 타고 서로의 할머니 댁을 방문하면서 꼭 함께 다시 오자고 약속했는데,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전과 다를 게 없이 너무도 화목한 가정과 좋은 친구들 곁에서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너와 나, 우린 이제 너무도 다른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열여섯 이후론 드문드문 만나던 친구를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망가진 내 모습을 들킬까 봐, 그런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내 삶은 온갖 불안과 절망으로 뒤덮여 있었고, 친구는 보통의 삶을 살아 냈던 것 같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고, 전문대에 들어가 학교 모델로 활동했던 친구의 사진을 보았다. 내가 사랑했던 얼굴 그대로였다. 이후 친구는 편입을 했고, 케이블 티브이에서 수습기자로 활동하는 영상을 보았다.

이후의 소식은 알지 못한다. 드문드문 친구의 미니홈피에 올라오는 사진들만 보았다. 친구의 삶이 부러웠다. 열세 살, 모든 게 닮아 있던 우리였는데 내가 가질 수 없었지만 가장 바랐던 보통의 삶 안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이 부러웠다. 진창 같은 내 삶이, 오래전 친구의 삶을 엿보며 패배감에 빠져 있는 내가 너무도 한심해 견디기 힘들었다. 절망 속을 헤엄 칠 때면 가장 먼저 떠올렸던 친구인데, 친구와 함께 보낸 1년의 시간이 나를 붙들어 주었던 수많은 밤이 있었는데, 온전히 그리움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못난 마음 앞에 난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다.


서른여덟이 된 지금, 내 노트북 안에는 친구에게 쓴 편지들이 있다. 네가 너무 그리웠지만 네 곁에 갈 수 없었던 나의 이야기들을 담은 편지. 그리고 지금도 상상하곤 한다. 언젠가 네 방에 누워 열세 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라디오를 들으며 뒹굴 거리는 모습을, 아무 말하지 않아도 편안했던, 서로의 얼굴만 보면 웃었던 그때처럼 다시 네 손을 잡을 수 있는 날을. 믿는다. 시간을 건너 너를 찾아갔을 때 말없이 나를 꼭 안아줄 너를.


나는 오늘도 네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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