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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08. 2022

나에게도 떡볶이가 필요하다.

떡볶이가 필요한 순간.

집콕 방학생활을 위해 백여 권의 만화책을 빌려왔다. 슬램덩크, 아기와 나, 더 콩쿠르, 원조 괴짜 가족, 야옹이와 흰둥이, 야채호빵의 봄방학 등등. 만화책이라도 쌓아 놓아야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것 같아서다. 문제는 백 권이라고 해도 이게 참 금방 읽힌다는 거. 더 빌려 왔어야 했나? 아이들의 베베 꼬이는 몸을 보고 있으려니 나까지 조급증이 나서 자꾸만 눈이 시계를 향한다. 시계를 보니 12시 59분. 그럴 리가 없어, 아직 한시도 안됐다니. 눈을 비비고 다시 시계를 보니 일분이 지나 정각 한시가 되었다.


아침엔  아이들에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동그라미 김밥을 해줬다. 나는 분명 요리를 끊었는데 '이건 간단한 거니까,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그냥 얼른 해주고 말자 싶어 자꾸만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망할!). 요리라 하기엔 너무 간단하고, 그렇다고 사 먹기엔 돈이 아까운 것들. 떡볶이나, 김밥, 볶음밥 따위.


 

동그라미 김밥


아이들은 하루 종일 누워 만화책을 보면서도 자꾸만 배가 고프단다. '그래, 먹어야 크지. 한창 클 때니까' 하다가도 수시로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간식 바구니에 얼굴을 넣다 뺐다 하는 아이들을 보면 뭘 하기도 전부터 힘이든다. 그치만 뭐라도 먹여야 하니 하는 수 없이 주방으로 가야만 한다.


오늘 점심으론 떡볶이를 만들어 줬다. 밀떡을 살짝 물에 불려 말랑말랑하게 만든 다음 간장과 설탕, 약간의 다진 마늘을 넣고 알맞게 조리기만 하면 되는 초간단 떡볶이. 내 입맛엔 별로인데 아이들은 참 잘 먹는다. 쫀득한 밀떡을 쩝쩝쩝 소리를 내며 맛있게 씹어 먹는다. "역시 엄마 음식이 최고야"라고 말하며 나를 향해 들어 올리는 통통한 엄지는 귀엽고 고맙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건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 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생각해 보면 결혼 후 내가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이  '오늘의 메뉴' 일거란 생각이 든다. 먹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먹고는 살아야 해서. 뭐라도 먹기 위해. 아니지, 뭐라도 먹이기 위해서 말이다.


결혼 전 엄마와 외식을 하러 나가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으면, 엄마는 항상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했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먹자. 남이 해주는 밥은 다 맛있더라"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 들었던 엄마의 말은, 지금 나의 말이 되었다. "아무거나, 난 아무거나 괜찮아" 이 말은 진짜다. 나는 정말 먹고 싶은 게 없다. 무얼 먹느니 차라리 누워서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보거나 책을 보는 게 더 좋다. 먹으면 또 치워야 하니까, 차라리 그럴 바엔 먹지 않음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음식을 하는 것도 힘들지만, 치우는 게 훨씬 더 귀찮다는 걸 치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아마 먹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은 치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일 거다. 혹은 음식을 만들지 않아도 식사가 해결되는 사람 이거나.


물론 나도 먹고 싶은 게 있는 날이 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날. 허겁지겁 먹지 않아도 되고, 맞은편에 앉은 이가 음식을 흘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누군가 가져다주는 것들을 받으며 '고맙습니다' 한마디 인사를 건네고 음식과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날 말이다. 될 수 있다면 그런 날 먹고 싶은 것들을 먹고 싶다. 그래야 진짜 먹은 기분이 든다. 아이들과 먹을 때면 아직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간장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을 보니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자벨 위페르가 나오는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틀어두고 소파에 기대앉아 플라스틱 컵에 들어있는 매운 떡볶이를 후루룩 첩첩 먹는 상상. 삶의 시련 앞에  흔들리는 듯 하지만 의연하게 자기만의 삶으로 걸어가는 나탈리(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쫓으며 먹는 떡볶이는 얼마나 황홀한 맛일까. 매운맛에 입술이 따갑고 얼굴이 벌게지면 아주아주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거다. 그럼 속이 뻥하고 뚫릴 텐데..... 하지만 현실은 간장 떡볶이를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아이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 설거지를 해야만 한다는 것.


오늘은 누군가 날 위해 맵고 맛있는 떡볶이를 해주면 좋겠다. 내가 만들지 않고, 치우지 않아도 되는 그런 떡볶이. 간장으로 맛을 낸 떡볶이가 아니라 고추장이 들어간 떡볶이. 하루치의 피로를 싹 날려줄 강력한 맛의 떡볶이. 나에게도 그런 떡볶이가 필요하다.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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