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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Sep 14. 2022

아무래도 난,

추석에 음식을 만들지 않은지 꽤 되었는데, 올해 새 가족(동서)이 들어오고 처음 맞이하는 추석이라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조금만, 진짜 조금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갈비 열 근을 재우고, 잡채 한 냄비를 하고, 전을 지지고, 오징어를 튀기고 새우를 튀겼다. 오징어 튀김은 기름이 미친 듯이 튀어서 너무 무서웠는데, 하다 그만둘 수 없어 으악 으악 소리를 질러가며 만들어야 했다. 친정에 가기 전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 자고 간다던 언니는, 주방에 음식판을 벌려둔 나 때문에 고무장갑을 끼고 수건을 다리에 덮고 앉아 내 옆에서 함께 소리를 질러가며 오징어를 튀겼다. 음식을 하고 주방을 치우니 저녁 여덟 시.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겨우겨우 끝냈다. 뿌듯하긴 했지만 힘들었고, 다시는 안 해야지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아이들에겐 저녁으로 햄버거를 시켜주고 언니랑 나가 소맥을 마셨다. 언니는 강남의 소맥 맛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소맥을 말아 젓가락을 컵 중간에 45도로 비스듬하게 세운 뒤, 다른 젓가락으로 컵 속에 든 젓가락을 탁탁 치니 하얗게 생크림 같은 거품이 잔뜩 올라왔다. '첫 잔은 원샷'이다.라고 해서 쭈욱 마셨다. 톡 쏘는 거품이 아니라 어찌나 뭉근하고 부드럽던지. 원샷이 뭐냐, 투샷, 쓰리샷도 할 만큼 맛있었다. 먹으면서 나의 아줌마 친구들을 생각했다. '좋았어, 다음에 저녁 약속이 생기면 써먹어야지' 하고.



막창에 달콤한 소맥을 먹고 들어와 오랜만에 언니랑 함께 잤다. 언니는 잠이 오질 않는다고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마흔 하나, 싱글, 비혼 주의, 서울에 살면서 강남으로 출근하는 사람. 나와는 너무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언니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재미났다. 특히나 직장 안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순진한 척하면서 치마를 걷어 올리는 여자, 결혼을 앞둔 동료를 짝사랑하는 남자, 웹툰 속 주인공처럼 입고 다니는 디자이너, 결혼을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주식 솔메이트 등등. 생생한 에피소드들이 넘처나는 삶은 씁쓸하고 외로운 장면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생생해서 자꾸만 듣고 싶었다. 명절이나 가족들의 생일,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공휴일이나 방학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일이 되는 내 삶과는 너무도 다른 삶. 우리는 같은 몸에서 나와 같은 곳에서 자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됐을까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어 버렸다. "야, 자냐?"라는 말 뒤로 짧은 한숨을 들은 것 같아 눈을 떠보려 했는데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나는 매번 언니가 오길 기다리면서 늘 먼저 잠이 든다. 잠이 들면서도 저녁에 노느라 하지 못한 집안일을 내일 어떻게 분배해서 할지 생각하며 피곤함을 덮어쓰고 잠든다. 미루면 미룬 만큼 그대로 쌓이는 게 집 안 일이라 하루도 맘이 편치 않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캐리어에 딱 내 짐만 넣고 언니를 따라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 걱정, 집안일 걱정은 다 내려놓고 지하철을 타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를 쏘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언니랑 갔다 입이 떡 벌어졌던 예스 24 강서구점을 다시 한번 가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 편안한 옷차림으로 책을 읽던 사람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서점이라곤 아이들 참고서만 잔뜩 쌓인 곳이 전부인 이곳에선 시간이 있어도 누릴 수 없는 풍경이었다.



종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지하철 역 앞에 살던 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놀러 다니기 바빴다. 반디엔 루니스, 교보문고, 영풍문고는 언제나 그냥 스치는 장소였다.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이야 매일 보는 풍경이라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면 서점 구석구석을 둘러볼 텐데. 어딘가에 앉아서 오래도록 책을 읽을 수도 있을 텐데. 혼자여도 괜찮다는 걸 몰라서 혼자이지 못했던 시간을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책 읽고, 혼자 걷고, 혼자 여행 가고. 이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삼시세끼 밥을 차려주고, 씻겨주고, 함께 숙제를 해야 하는 아이들이 넷이라 그런 일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해져 버렸다.


올 겨울엔 서울에 갈 수 있을까? 내 짐만 넣은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혼자 서울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면 언니가 찍어 보내주던 예쁘고 맛있는 음식들을 언니랑 마주 앉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 정말로 오기는 올까? 서울에 오면 함께 가자던 맛집 리스트들은 매일매일 늘어가는데 일상을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서울 사람들은 산과 바다를 보러 차를 타고 내가 사는 곳으로 오듯, 나는 반짝이는 조명과 8차선 도로 위를 가득 메운 다양한 사람들이 숨 쉬는 곳으로 가서 팔닥거리는 삶을 가슴 가득 담아오고 싶다. 하루쯤은 그렇게 심장이 쿵쾅 거려도 재미있을 텐데. 씩씩하게 폭탄주를 만들고 있으면 카메라를 들이대며 인터뷰 요청을 한다던 유투버들을 보게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아무래도 난, 즐겁고 신나는 일을 기다리나 보다. 매일 아침 안개가 자욱한 소백산을 넋놓고 바라보며 농장으로 가면서,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면서, 식탁 밑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와 눌어붙은 밥풀을 떼어내면서, 밤이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떨어트리는 책을 보면서 난, 무언가를 기다리나 보다. 언제 올지 모를, 무엇이 될지 모를 그런 일들을. 잠이 오지 않는 밤 이면 상상해보는 멋진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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