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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Sep 19. 2022

진심을 다해.


"형아야, 대박사건. 내가 방금 코딱지를 팠거든, 근데 거기에 코털이 묻어 있었어"

"와, 소오름. 야 너 벌써 사춘기 왔냐?" 


침대에 누워있다 들려온 열 살 셋째와 여덟 살 넷째의 이야기에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코딱지 판 것을 자랑스레 말하고, 작은 코털 하나에 지들끼리 까르륵 거리며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우습던지. 한참이나 코딱지 이야기를 나누던 셋째와 넷째가 집 앞 분식점에 가서 주먹밥을 사 먹겠다고 나갔다. 추석에 용돈을 두둑이 받은 막내가 셋째에게 한턱 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가기 전 탄산음료는 먹지 않기로 약속을 했는데, 잠시 후 현관에 들어서는 아이들의 손에는 콜팝이 들려 있었다. 


"얘들아, 탄산음료 먹지 않기로 분명 약속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으니 "엄마, 이건 탄산이 아니고 슬러쉬잖아"라고 한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슬러쉬가 되는 동안 음료의 탄산은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에 탄산이 아니라는 거다. 당당하게 양손으로 컵을 쥐고 후륵후륵 요란한 소리로 빨대를 빠는 아이들을 보니 진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당당할 수가. 나는 그냥, "그렇구나, 엄마는 몰랐네"하고 말았다. 막내는 단물은 다 빨아먹어서 허연 얼음만 그득한 컵을 들고 앉아 고개를 처박고 온 힘을 다해 후륵후륵 빨대를 빤다. 미간에 힘을 빡 주고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는 코딱지를 파도, 슬러쉬를 먹어도, 모든 순간이 다 진심이구나'하고. 


슬러쉬 한통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 아이들은 거실 중간에 앉아 팽이 싸움을 했다. 

"형아야, 내 팽이는 토네이도야" 

"야, 내 팽이는 매미거든!" 

"와, 그래서 그렇게 강했구나 진짜 멋있다!" 

막내는 태풍의 이름을 딴 셋째의 팽이를 또 한 번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백의 자리 숫자 곱하기를 하는 형을 보며 박수를 칠 때에도, 형아에게 들이대며 까불 때에도, 단물이 빠진 슬러쉬를 먹을 때에도, 코딱지를 파고 관찰할 때에도 아이는 모든 순간이 다 진심이고 최선인 거다. 최선을 다해 먹고, 웃고, 놀고, 싸우고, 사랑하며 진심을 다해 하루를 살아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잠이 든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이의 하루, 단 1분도 허투루 쓸 수 없어 무얼 하고 놀까 고민하는 아이의 시간은 매일을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내 시간에 비하면 얼마나 뜨겁고 벅찬 시간일까. 



여전히 많은 날들을, 주어진 하루가 아닌 지나가거나 다가올 시간을 붙들고 살아내느라 마음을 다 잡아도 금세 헝클어지고 마는 나의 시간들이 부끄럽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 누구나 보이지 않게 버둥거리는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단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엉성한 마음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날이면 나만 홀로 버둥거리며 사는 것 같아 내가 밉고, 세상이 미워진다.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아이들과, 지는 해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다른 마음일까?. 중심이라 불리는 것들에서 어쩐지 다 비 켜나 있는 것만 같은 삶이 때론 지루하고 때론 못 견디게 씁쓸해 많은 날들을 즐겁고 기쁜 마음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과 외로움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헛헛한 마음이 무엇으로도 달래 지질 않는다. 흔들거리는 삶, 비틀거리는 삶은 중심을 잡기 위한 거라던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중심에 다다를 수 있을까. 


베개커버가 다 젖도록 땀을 흘리며 자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고, 둘둘 감고 있는 이불을 조금 벗겨내 본다. '너는 참 예쁘구나. 땀을 흘리는 모습도,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자는 모습도, 작고 통통한 손도, 볼록 나온 배도, 이제는 제법 길어진 다리도 어디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구나' 생각하며 보고 또 보고 만지고 쓰다듬는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해 아이를 지켜보는 많은 순간들처럼, 누군가 나를 그렇게 봐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꾸만 엉크러지고 덜컹거리는 마음이, 무언가를, 누군가를, 미워했다 용서했다 그리워했다 하는 어지러운 마음들이 잔잔해질 수 있도록, 누군가 내게 벅차고 따뜻한 마음을 흠뻑 쏟아내 주면 좋겠다는 생각. 마음만은 부자라는 말. 그런 말에라도 가닿고 싶은데 아직은 한참 멀게만 느껴진다. 


잠든 아이의 얼굴이 평화롭다. 숨소리가 달고 따뜻하다. 아이의 얼굴에 손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 본다. 나도 너처럼 그렇게 평온한 얼굴을 갖고 싶어서.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작은 아이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정성을 다해 오래도록 아이를 보고 또 본다. 그래, 너무 무거워지지 말자. 돌아보면 한 번 도 생각대로 굴러간 적이 없는 삶 아닌가. 내일은, 다가오는 날들은 나도 아이처럼 주어진 것에, 지금 내 앞에 놓인 것에 좀 더 진심이고 최선일 수 있는 삶을 살아보자 생각한다. 우울과 냉소 비관과 불안에 닿아있는 딱딱한 마음들이 녹아, 스치는 기쁨과 작은 행복들에 닿을 수 있도록 내 마음에 정성을 들여야지.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나를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나의 하루를 그렇게 채워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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