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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Sep 19. 2022

<책>여자들의 사회/권김현영

잃어버린 주체를 찾아서.


“나는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주체’에요.” 라던 J의 말을 듣고 책 속에 등장한 여성들의 비 주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성적 대상화가 되어 대중에게 보여지는 ‘신체’로만 존재해야 했던 여성 아이돌,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거부당해야 했던 윤희의 메마른 삶, 위계 로맨스 안에서 구원자인 남성을 기다리는 뻔한 여성 주인공들의 이야기 등……. 하지만 세상은 윤희의 남편이 그녀가 왜 그렇게 외로워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여성이 왜 비주체적인 존재로 자리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여성은 본래 남성보다 나약한 존재라던가, 무언가에 기대고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새로운(그러나 뻔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뿐.    

  

하지만 여성인 나는 안다. 사회가 허용한 성(性)적 개념의 경계 안에서만 지지받고 응답받을 수 있는 삶 속에서,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보지만 결국엔 그 용기 때문에 상처받고 무너지고 소외되고 만다. -독서모임의 발제자였던  K가 학생들에게 <룸펠슈틸츠헨> 이야기를 들려주고 누가 가장 악당인 것 같냐고 물었을 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징징거리던 소녀라고 대답했다던 아이. 어쩌면 그 아이는 주체성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삶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 이미 자기(self)를 잃어버렸거나 한 번도 자기(self)를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일지 모르겠다는 생각.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삶- 나는 요즘 이것이 내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읽고 쓰며 나를 채우면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삶에 여전히 닿지 못했다. 더는 무언가를 읽는 것만으로, 친한 친구에게 나의 불안과 우울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괴로워 자주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억압받은 자들의 본능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데 있다”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용기, 온갖(비난, 경멸, 무시 등) 표정을 담고 있는 침묵으로 응답받지 못한 숱한 이야기들, 진실하지 못한 끄덕거림, 때론 적나라하게 일그러지던 얼굴을 마주해야 했던 순간들. 애써서 꺼낸 나를 검열하고 다시 작은 상자 안에 가둬 두면서 나는 숨죽여 울었었다. 가끔은 끝까지 ‘나’를 몰랐으면 좋았겠단 생각도 한다. 그럼 지금처럼 내 마음이 사나워 지지는 않았을것 같아서.  


내 생각을 말하고, 내 의지에 따른 결정을 하며 살고 싶다는 소망은(너무도 당연하지만) 마치 작은 불씨를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불씨를 내려놓을 수 없다. 그보다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라고 말했던 허니 제이처럼 “잘 봐, 내가 이 불씨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 내는지”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고, 아무런 응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매일 밤 고통 속에 몸부림 칠지언정 나의 저항이, 애씀이, 혼자 쏟아내야 했던 눈물이 끝내는 순응에 닿게 하고 싶지 않다.


시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건 우리 중 누구도 그 안에서 온전한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가족 안에서도(특히 원가정). 자식, 며느리, 엄마, 아내라는 이름이 앞에 나오면 우리는 금세 납작해지고 만다. 나를 포용하지 않는 누군가를 끌어안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누군가의 안부를 먼저 물어야 하며, 나의 생각을 말할 권리는 잃은 채 상대방의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들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비존재가 되어 다른 존재들을 받쳐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다. 그것이 진심이든 진심이지 않던.


물론 세상이 조금은 변해서 정색하며 나를 낮추라고 말하진 않지만 웃으며 얘기한다고 해서 맥락이 변하진 않는다. 그들은 온화한 가스라이터다. 그 안에서 나는 예민한 감정 과잉 자가 되든지,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이상한 여자가 되고 만다. 종종 혹은 자주.  



페미니즘과 인권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었었던 때, 내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몰랐을 땐 한 번 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삶을 꿈꾸면서 벅찬 감동까지 느꼈다. 하지만 요즘의 난 다시 내게만 질문을 던진다. 대체 내가 무얼 잘못한 걸까? 하고.  능력도 없이 과장된 꿈을 꾸고 있는 나를 탓하고, 기혼 여성인 주제에 육아와 가정보다 ‘나’를 앞세우고 싶은 못난 욕심을 부리는 나를 채찍질한다.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한 엄마의 모습을 생생하게 아이들 앞에 보이고 마는 나의 허약함에 대해서도……. 습관적 자기 감시 체제를 풀가동하며 내 안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있는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한 주체성을 가지고 단단해지지 못한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삶을 공유함으로써 지금의 삶이 실패가 아닌 투쟁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얼마 전 읽은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라는 그림책에서 “집이 항상 장소를 뜻하는 건 아니야”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그 말의 뜻을 이젠 정확히 알 것 같다. 삶의 고락을 함께 나누며 끈끈하게 뒤엉킨 관계가 아니라도, 끝까지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없어도, 우리는(사랑하는 나의 친구들) 마음만 먹으면 서로의 집이 되어줄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이야기에 대한 응답,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주체가 될 수 있었으니까.    


실패라 여겨졌던 내 삶도 이곳(독서모임에 오면)에서 만큼은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건 싸우지 않아도 주어지는 ‘존중’이 있어서일 거다. 그것만으로 나는 다시 희망을 갖는다. 그러니 세상아, 함부로 내 삶을 부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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