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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Sep 20. 2022

서른 아홉번째 가을은 무엇으로 채우게 될까?

낙엽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 사랑이 찾아온다고.

아침저녁으로 날이 선선하다. 이제는 제법 가을 냄새가 난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길냥이 밥을 주고, 쭈그려 앉아 등허리를 쓰다듬고 있으면 앙증맞은 야옹이의 하얀 발 주변에 굴러다니는 단풍이 보인다. 서른아홉 번째 가을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계절의 변화 같은 건 잘 모르고 지났었다. 날이 좀 더우면 반팔을 입고, 바람이 불면 긴 옷을 꺼내 입었다. 계절이 바뀐다고 맘이 들뜨거나 싱숭해 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발 을 굴러다니는 단풍에, 살랑 살상 부는 바람에, 길가에 핀 작은 코스모스 따위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 마음이 머문다. 이러다 곧 나도, 예전의 엄마처럼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모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 모두가 그런 걸까?  


빨래를 하느라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고 있으면 1층 화단 앞에 서있는 어르신들이 보인다. 알록달록 예쁘게 핀 꽃들 앞에 서서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는 사람, 허리를 숙여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는 사람, 태풍에 쓰러진 꽃 대를 세워 묶어 주는 사람은 모두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뿐이다. 십 대 초반의 어린 친구들은 손에 쥔 휴대폰을 보며 걷고, 이십 대의 젊은 친구들은 옆에 있는 연인의 얼굴을, 내 또래의 아줌마들은 손을 잡고 있는 아이를 챙기거나, 바쁜 걸음으로 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스친다. 매일 강변 산책로를 따라 운동을 하는 엄마는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본 어르신들처럼 분명 어딘가에 서서 열심히 꽃 사진을 찍고 있을 거다.



복숭아 포장을 끝내고 둘째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가는 길, 나는 일부러 바람을 맞으려고 창문을 다 내리고 운전을 한다. 아직은 초록잎들이 더 많지만, 드문드문 벌써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과 길가에 핀 꽃들을 보는 것이 좋다. 차가 많지 않은 시골길은 천천히 달리면서 마음껏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산과 들, 푸른 하늘이 한눈에 보인다.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앞뒤로 꽉 막힌 차들이 없어서, 소음과 매연이 없어서 길 위에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다.


아이를 태우고 피아노 학원으로 가면서 바이브의 <가을  타나 봐 >를 들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한 시간 연속 듣기로 며칠이고 한 곡만 듣는다. 운전을 하면서 흥얼거리니 아이가  "엄마, 대체 이게 무-으-슨 말이야?" 하고 묻는다.


무슨 소리긴 가을 탄다잖아. 계절이 바뀌고 낙엽이 지고 하니까 외로워지는 마음을 노래한 거 같은데,라고 하니 아이가 웃는다. 너무 이상하단다. 가을이 오는 게 왜 외로운 거냐고. 하기야 쌓아둔 추억보다 쌓아갈 추억이 많고, 지나온 계절보다 마주할 계절이 훨씬 더 많은 아이는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나도 그랬으니까. 노래 가사처럼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겠니.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니 아이가 슈뻘맨의 <행복 찾기>를 듣자고 한다. 요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맨의 노래 가사는 이러하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학교 가고 졸린 눈 비벼가며 도착해도 오늘 하루가 막막해. 학교 끝나고 또 학원 마쳐도 잔뜩 쌓여있는 숙제. 발자국 소리가 큰 우리 뛰어놀고 싶은걸. 뛰어보자 행복은 학교와 학원 사이. 놀러 가자 웃음은 친구과 친구사이.......' 


아이와 나의 세계는 이렇게 다르다. 나는 추억을 찾고, 아이는 행복을 찾는다. 돌고 돌아오는 계절이 어쩐지 나는 외롭고, 아이는 그저 신이 난다. 가을이 오면 겨울의 눈썰매를 기다리고, 봄이 오면 여름의 바닷가를 기다리듯 아이는 언제나 기다림과 설렘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 나는 무엇으로 이 가을을 채워갈 수 있을까?



벚꽃이 만발했던 봄, 친구와 함께 하천을 따라 벚꽃 길을 걸었었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날리니 친구는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방방 뛰어다녔다. 꽃 잎 몇 송이를 움켜 잡았던 친구의 소원은 정말  이루어졌을까?(이루어졌다면 좋겠다)


얼마 전 책에서 낙엽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 사랑이 찾아온다는 구절을 읽고 생각했다. 복숭아 포장이 끝나면 친구와 함께 부석사에 가야지 하고. 노란 은행잎이 덮인 길을 걷고, 식당에 들어가 도토리묵무침과 배추전에 막걸리도 마시고,  친구랑 같이 단풍나무 아래에 조금 서 있어 봐야지 하고. 낙엽이 머리 위로 떨어지길 기다리면서 말이다. 친구 머리에 하나, 내 머리에 하나 낙엽이 떨어지면 떨어진 낙엽을 잘 들고 와 책 사이에 넣어둘거다.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한 날이면 단풍나무 아래 서있던 그날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한 번씩 들여다봐도 좋을 것 같다. 이 또한 나를 위한 정성의 시간일 테니까.  


부디, 서른 아홉번째 나의 가을엔 외로움보다 사랑이 가득하길. 쓸쓸함 보단 즐거움이, 신나는 아이의 마음처럼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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