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Sep 21. 2022

우리 언제 만나?

친구가 그리운 밤.

며칠 전 친구의 글 속에 등장한 나를 발견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통화를 했고, 못 몬 지 꽤 되어서 빨리 만나자고 보고 싶다고 조금 징징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친구의 글에 나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고 힘이 나는 벗으로 쓰였다. 식탁에 앉아 아이들이 먹다 남은 후르트링에 맥주를 홀짝 거리다 친구의 글을 읽고 가슴이 찌릿했다. 그리고 조금 울컥해서 얼른 벌컥벌컥 맥주를 마시고 한 입 가득 후르트링을 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친구에게 하트를 가득 담은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 쑥스러워 말았고, 찡한 마음 위로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단순노동이라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복숭아 포장은 시간이 쌓일수록 피로도가 높아만 진다. 9시부터 2시 30분까지 이어지는 작업을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학원에 내려주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 옷만 갈아입고 거실 바닥에 누워버린다. 그렇게 조금 누워 있으면 구석구석 치워야 할 것들이 보여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그러다 보면 뛰어오는 아이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다다다닥!)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배고프다고 달려드는 아이들과 저녁시간을 보내고 나면 하루해가 저문다. 안팎으로 열심히 움직이며 하루를 보내지만 정신이 없으니 무얼 하고 사는지 모르겠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자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잠이 드니 더 그렇다. 책을 읽고 싶은데 피곤하고, 글쓰기 모임 글을 써야 하는데 에너지가 없어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룬다.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나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며 했던 일들이라, 그걸 제대로 못하니 조금은 불안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 그렇게 우울에 닿아있던 마음이 친구의 글을 읽고 나니 한결 편안해졌다.


책을 읽지 않아도, 글을 쓰지 못해도, 꼭 무얼 하지 않아도 친구에게 나는 좋은 사람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과 글로 만났지만 그걸 뛰어넘는 것이 우리 사이엔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기혼 여성, 그리고 엄마로 살아가면서 비슷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가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들. 조금 더 잘 살아보자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자고 서로를 토닥이며 위로했던 시간들. 각자의 우울을 휘장처럼 거느리고 만나도 서로를 위로하려 애쓰던 그런 시간들이 우리 사이엔 있었다. 괜찮다는 말, 할 수 있다는 말, 네 말이 백번 맞다는, 그 듣기 힘든 말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서로를 향해했었나. 때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너무 버거워 오래도록 동굴 속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우리는 서로를 기다렸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던 시간 사이사이에도 서로를 향했던 마음이 있었을 거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태어나 기고, 걷고, 뛰어다니다, 학교에 입학하기 까지. 이제는 헤어짐을 생각할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을 우리는 함께 했고, 지금도  '친구' 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간다. 가끔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경계를 조금 넘어서기도 하고, 고민만 하다 전하지 못한 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 나는 친구 앞에서 마음을 사리지 않았다. 재빨리 받아칠 말을 생각해야 하는 번거로운 애씀도 없었다. 어쩌면 그건, 내어준 마음보다 받은 마음이 더 많아서 인지 모르겠다. 낯가림이 심하고 쉽게 긴장하는 성격이라 언제 만나도 조금은 서툴고 어색한 나를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 줬던 마음.


어제는 친구 j와 통화를 했다. 그냥 잠깐 목소리만 들으려고 했는데 끊고 나니 38분이 지나 있었다. j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합시다" 하고.


우리 셋, 나의 이야기를 써준 k와 나 그리고 j는 친구다. 내가 제일 많이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들. 절친이란 말은 안 할 거다. 그건 너무 진부하고 촌스럽다. 우리는 절친보다도 진한 사이다. 그렇게 믿는다. 조만간 친구들을 만나면 강남의 소맥 맛을 보여줘야지. 열심히 연습하다 컵 까지 깨트렸던 뭉근하고 부드러운 소맥을 사이좋게 나눠 마시며 그동안 못하단 이야기를 오래도록 하고 싶다. 불안한 마음도 의연하고 태연하게 만들어주는 친구들의 눈빛이, 따뜻한 목소리가, 호탕한 웃음소리가, 재미난 이야기들이, 그리운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서른 아홉번째 가을은 무엇으로 채우게 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