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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Sep 23. 2022

괜찮아, 잘했어, 수고했어.

쓰면서 머무르는 시간


한 달에 한 번, 5년째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공부하느라 잠시 나가지 못하던 때를 빼면 줄곧 나갔으니 꽤 오래 내가 붙들고 있는 일에 속한다. 될 수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 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독서모임에 나간다는 것은 꾸준한 책 읽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가끔 책 같은 거 이렇게 열심히 읽어서 뭐하나, 누가 알아주나, 삶이 크게 달라지나 괜한 생각이 들 때에도 '독서모임'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 만으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수 있다.


전업주부 11년 차, 명함도 없고, 이력도 없고, 매일을 열심히 살아도 밖에 나가면 그냥 '아줌마'밖에 되지 못하는 내게 독서모임은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 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만큼은 엄마도, 아내도, 아줌마도 아니라 '나'라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그럴 거다. 그런 모임을 두 달째 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은 1년에 한 번 있는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다.


농장으로 출근하는 길, 오늘은 일부러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고 도로 위를 달렸다. 우울한 내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해가 쨍하고 뜬 파란 하늘을 보면서 '괜찮아, 괜찮아' 가서 즐겁게 포장하고 기분 좋게 오자 여러 번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집에 오니 마음이 까무룩 가라앉는다. 올해 그림책을 출판한 독서모임 회원님의 강의가 너무 좋았다는 말, 친구 초대로 함께한 분들의 이야기들도 너무 좋았다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또 내게 중요한 것들에서 빗겨선 기분이 들었다. 나를 중심에 두고 선택할 수 없는 삶,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주어진 것을 해야만 하는 삶, 그로 인한 작은 불안이나 우울 따윈 너무도 하찮고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삶이 잠깐 동안 억울해서 혼자 또 울컥했다. 종잇장 같은 감정선, 언제고 툭 찢겨 마음을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마는 이 얇디얇은 마음을 대체 어쩐단 말인가.


그럼에도 오늘은 내 마음을 달래 보려 애쓴다. 독서모임이 나의 전부는 아니니까. 그전에 내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 독서동아리는 삶의 동력이 되는 소중한 모임이지만 오늘 난, 누구보다 열심히 하루를 살았으니까. 내가 채운 하루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을 치우고, 열심히 복숭아를 포장하고,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 학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와 했던 많은 일들. 허투루 보내지 않은 나의 하루, 그 하루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사라지지 않은 하루가 있다. 남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로 가득 채운 시간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또, 독자가 없어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용감하게 글을 쓰는 나도 있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을 토닥이기 위해 글을 쓰며 스스로의 안부를 묻는 나.



아직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이런 시간 이런 글들이 내겐 우거진 숲을 헤쳐 나갈 때 필요한 '주머니 칼' 같은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책상에 앉아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서 붙들어야 할 것 과 버려야 할 것을 골라낸다. 서툴고 느린 탓에 아직도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삶을 조금이라도 내 가까이 끌어당기기 위해 쓴다. 발 밑으로 나를 끌어내리는 감정들을 툭툭 떨어내고, 너무 오래 멈추지 않기 위해 쓴다.


삶을 기록한다는 것,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루와 부끄럽게 날뛰는 감정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용기를 내어 머무르는 중이다. 나를 더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매일의 시간 앞에 머물러 나를 바라본다. 오늘 내가 사랑한 것 과 사랑하지 못한 것들을 되짚어 보고 돌아본다. 될 수 있다면 사랑에 가닿았던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려 노력한다. 한마디의 말, 찰나의 마음, 눈빛, 표정, 그 어떤 것이라도 순간이나마 나를 채웠던 것들을 붙잡으려 노력한다. 그럼, 얼기설기 뒤엉킨 엉망 같은 하루 안에서도 특별하고 빛나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지금 내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잘하지 못한 것을 붙들고 고민하고 자책하기보다, 조금이라도 잘했다고 생각한 것들을 내 앞에 놓아두고 스스로를 각성시키는 일. 만성처럼 들러붙은 내 안의 우울과 불안을 달래고 스스로에게 '괜찮아, 잘했어,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짧은 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


오늘의 내게 말했다. 네 마음이 불안하고 우울한 건, 기대와 희망이 있어서라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 잘 살고 싶은 욕망. 좀 더 나은 네가 되고 싶은 바람이 있어서라고. 너는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라고. 결국엔 너의 불안과 두려움이 너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일어서 본다. 오늘 아침 올려다봤던 파란 하늘을 생각하면서, 운전하는 동안 손등에 떨어진 따뜻한 햇살과 집으로 돌아오면 늘 달려와 반겨주는 사랑스러운 길냥이의 인사를 생각하면서. 그래, 오늘도 꽤 괜찮은 하루였다고.


잘 다녀왔냐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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