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엄마의 말뚝/박완서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by 고운

나는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며 시대를 관통하여 살아낸 여성의 강인함 보다 그 뒤에 숨겨진 외로움, 절망, 눈물, 불안을 홀로 끌어안은 채 뒹굴며 버텨낸 암담한 엄마의 시간을 본다. 그건 수술 후 온몸으로 아들을 기억하며 착란 증세를 보이던 엄마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40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고 몸속에 가둬 두어야 했던 고통의 크기를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책 속에 묘사된 엄마의 자비로운 미소가 더없이 슬프고 아프게 다가왔다.


양반집 맏며느리라는 고고함으로 열악한 현저동에서의 삶을 견뎌 냈듯,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으로 아들의 죽음도 견뎌냈던 엄마의 몸 안에, 살기 위해 끄집어내지 못한 숱한 눈물은 모두 어디로 흘러간 걸까. 엄마의 억척스러움이나 희생만으로 바꿀 수 없었던 지난한 삶과 죽음의 장면들을 보며 결국엔 상처의 구렁텅이가 되고 만 현저동에 박힌 엄마의 말뚝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엄마’라는 이름에 고착화된 여성의 삶이 강인함이나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대체될 때 오롯이 여성인 엄마가 혼자 감당해 내야 하는 고통은 너무 쉽게 은폐되기 때문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능동적 삶을 살아보려 했지만, 그런 의지조차 가부장의 구조 안에서 확장되는 것에 그치고 마는 장면들은 너무도 극명하게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준다. 아들과 딸을 향한 욕망의 차별성, 양반가문의 긍지를 버리지 못하고 존재를 구별 짓는 행위, 오로지 자식 성공에 매몰된 삶의 장면들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불합리한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결국 문밖, 문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아들의 죽음으로 훼손되고 만 엄마의 말뚝을 보며 생각했다. 엄마가 온화한 미소를 짓는 대신 충분히 아파하고 괴로워할 수 있었다면, 한 번쯤 고꾸라져 슬픔을 토해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나는 가부장의 그늘이 빼앗아간 엄마의 눈물을 찾고 싶다. 강인함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빛나는 모성 뒤에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엄마의 욕망도 함께. 딸에게 강요하던 신여성의 삶, 제도와 관습에 굴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삶에 엄마가 먼저 가닿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난한 삶의 고단함과 전쟁이 남긴 아픔까지 안으로만 삼켜야 했듯, 한 번도 온전히 자기를 드러내지 못했던 엄마의 삶이 아파 낮은 숨이 새어 나온다.


나의 아픔은 현실에서도 이어지는데, 그건 여전히 목소리를 갖지 못한 엄마의 삶을 지켜봐야 하는 것과, 목소리는 가졌지만 그래서 더 괴로운 나의 삶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의 엄마와 나의 친정엄마, 그리고 엄마로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어쩐지 많은 부분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에겐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낸 아픔이나 상처를 외칠 광장이 있다는 것. 나는 더 이상 안으로만 고통을 삼키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다양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지만, 밖으로 터진 목소리가 변화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단 공중에서 흩어지거나, 오히려 화살이 되어 발화자를 공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나 자유를 외치며 구조적인 차별에 대항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드러낼 수는 있지만 이후의 삶은 다시 또 상처받은 자들의 책임이 되고 만다.


이런 사회에서 수많은 엄마들이 가부장의 질서 바깥에 꼽아놓은 말뚝은 너무 쉽게 훼손되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건 아들의 죽음으로 훼손된 말뚝보다 더 큰 상처이고 고통이다. 소설 속 말뚝이 헌신과 희생의 말뚝이라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말뚝은 엄마의 삶,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이기 전에 ‘사람’으로 살기 위해 박혀있는 수많은 현실의 말뚝을 본다. 그건 아기를 재우고 늦은 밤 식탁 위에서 공부를 하는 엄마의 모습, 육아휴직 이후에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종종거림, 육아서와 자기 계발서를 동시에 섭렵해야만 하는 고단함, 그 와중에 자신이 아이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설명해야만 하는 서러움 까지, 엄마들의 일상을 조금만 관찰하면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내기 위해 애쓰며 박아 놓은 수많은 말뚝이 얼마나 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위태롭게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수 없이 훼손되고 부서져야 했던 엄마의 말뚝을. 가족의 그림자만 쫓아야 했던 엄마의 삶, 누구도 묻지 않았던 엄마의 안부, 소리 없이 삼켜야 했던 쓴 눈물과, 밤새 가슴을 쳐야 했던 어둡고 긴 엄마의 밤들을.


물론 엄마의 삶이 아프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 감사의 시간들이 엄마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묻고 싶어 진다. 한때는 엄마의 말뚝이었을 나(혹은 우리)를 보며 엄마는 지금 행복하냐고. 잘 살기 위해, 엄마로 살아내기 위해 쏟아냈던 시간들이 지금도 엄마를 단단하게 붙들어 주냐고 말이다.



2022년을 엄마로 살아가는 나는 여전히 세상을 뛰어넘을 수 없을 거란 절망감을 안고 매일매일을 살아간다. 아무리 촘촘하게 말뚝을 박아놓고 꿈을 꾸어도, 나의 노력이 스스로에 대한 한낱 위안으로 밖에 경험되지 못할 때면 부서져 흩어진 마음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엄마가 ‘나’를 꿈꾸며 산다는 것은 그렇다. 너무 많은 분노와, 너덜너덜한 감정의 변두리를 빈번히 홀로 배회해야만 한다.


언젠가 엄마에게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아주 신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는데, 몇 가지 에피소드 안에 엄마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엄마가 주인공이자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서. 엄마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엄마에게 얼마나 둔감했던가. 자신을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든 엄마의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쓰면서 매일매일 꺾어져 무심함 중년 여성이 될 때까지 우리는 왜 몰랐을까. 조금씩 닳아 없어지던 엄마의 삶을...

소설 속의 ‘나’는 착란 증세를 보이며 불가사의한 괴력을 보이는 엄마의 얼굴이 낯설어 놀란다. 그건 주인공이 사랑했던 자비롭고 천진한 엄마의 얼굴이 아닌 분노와 적의, 원망이 뒤섞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런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보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낯선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엄마의 목소리로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흘러간 엄마의 시간과, 고스란히 삼켜야 했던 슬픔들, 한 때는 꿈 꾸었지만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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