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로받고 싶어서 얘기하는 거야. 근데 엄마는 왜 자꾸 따지기만 해!" 둘째 아이가 씩씩 거리며 방문을 쿵 닫고 나가버렸다.
주말에 있을 피아노 콩쿠르를 앞두고 오늘 선생님에게 된통 혼났다는 아이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네가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셨을 거야. 연습하다 보면 잘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잖아. 아무래도 네가 콩쿠르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것도 경험이 쌓이면 나아질 거야.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고. 나름 아이를 위로하고 싶어 던진 말이었는데 아이는 내 말 때문에 더 속상해하는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아이가 나간 뒤 침대에 걸터앉아 내가 한 말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은 속상해하는 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선생님을 향한 이해에 닿아 있었다. 첫마디부터가 틀렸던 거다. '많이 속상했겠다.' 하고 그냥 안아줬다면 좋았을걸 그러질 못했다.
나는 아이가 감정을 통제하길 바랐던 것 같다. 혼나서 속상했다는 말보다, '혼났지만 괜찮아. 그런 날도 있을 수 있지 뭐.' 같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 말이다. 아이는 다만, 속상함에 대한 위로가 필요했을 뿐인데 나는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었나 보다.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던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위로에 서툴러서 미안해'라고. 그리고 한참이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서. 때론 생각처럼 잘 안 되는 일도 있고, 노력을 해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 선생님의 화가 피아노를 칠 때의 실수를 향한 것인지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단지 부끄러웠다고 했다. 함께 콩쿠르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모여 돌아가면서 한 번씩 피아노 연주를 했는데 하지 않았던 실수를 연달아해서 혼이 났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학교 선생님과 상담을 하다 알았다. 아이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숙제를 한다는 걸. 집에서 숙제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숙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면 시간이 늦으니 학교에서 미리 제 할 일을 다 했었던 거다. 선생님은 아이가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자기 할 일을 빼먹지 않고 하는 것이 기특하다고 하셨다. 아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루에 4시간씩 피아노를 치면서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건, 본인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서 일거다.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노력과 애씀이 필요한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어제 내방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울었다. 일주일 전 콩쿠르에 나가 학년 1등 상을 받았는데, 그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다시 또 피아노에 앉아 더 빛나는 연주를 위해 같은 곡을 수 백번 반복해야만 한다. 하루라도 손을 놓으면 그만큼의 타격이 있고,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연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굳이 안 해도 될 말들을 길게 늘어놓았으니 아이는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뻔한 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마음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 말은 하지 말자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자꾸만 반복한다. 물론 잔소리밖에 되지 않는 지루한 말들의 동기를 헤아리면 아이에 대한 애정과 염려에서 출발했겠지만, 분명 마음 깊숙한 곳엔 부모의 욕심이라 불리는 것들과 나라는 인간이 가진 결핍의 조각들이 만나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그걸 사랑이고 애정이라 착각하는 것 일뿐.
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준 아이에게 고맙다. 엄마 말이라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딸이 아니라서 고맙다. 아이가 반항 섞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또 몰랐을 거다. 마음에 가닿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고 아이를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겠지.
살다 보면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일들의 대표적인 예가 가족이 아닐까 싶다. 보이지 않는 위계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하는 날이 있고, 위계가 없더라도 사랑이라 불리는 것 앞에 솔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렇게 삼킨 마음들이 쌓여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고, 분노가 되고, 증오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랬다. 원망과 미움이 이해가 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온전한 이해엔 가닿지 못해 어떤 날엔 홀로 가슴을 쳐야 하는 날이 있다.
<가족이라는 병>이라는 책을 보면 '거짓은 화목하지 않은 가정보다 화목한 가정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아마도 그건, 가족 안에서 자식으로만 혹은 부모로만 살아서 그럴지 모른다. 도리라 불리는 것들이 습관처럼 달라붙어 사람대 사람으로 만나지 못하는 관계. 마땅히 옳다고 말하는 것들을 지키다 보면 쌓이는 선의의 거짓말. 그러다 소리 없이 멀어지고 뒤틀리는 관계.
어쩌면 내 아이는 마땅히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에서 조금 벗어난 아이일지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만 하는 아이, 감정에 솔직해서 마음을 숨기는 일을 하지 못하는 아이니까. 그래서 나도 때론 곤욕스러울 때가 있고, 그런 아이의 말이 상처가 될 때도 있지만 수면 위에 드러난 갈등은 가슴에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당장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다 보면 이해에 가닿는 순간이 있다. 솔직함은 그래서 좋다. 이해를 뒤로 미뤄두지 않는다.
나는 아이와 내가, 우리 가족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서로를 이해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길 바란다. 자주 투닥거리고 목소리를 높여 싸우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삶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는 앙금보다, 서로에 대한 분노를 허락할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다. 힘들어도 거짓보단 솔직함으로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텨낼 수 있는 가족이고 싶다.
속상한 아이의 마음이 풀어질까 싶어 산책을 갔다 초콜릿 마카롱을 하나 사서 몰래 주었다. 위로엔 젬병이지만 사랑엔 젬병은 아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