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Oct 19. 2022

말에 기대어.

"네가 뭐 어때서?" 

열일곱 추석. 외갓집 거실에 앉아 송편이며 전을 주워 먹고 있는데 막내 외숙모가 말했다. oo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니 네가 좀 설득해보라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 동생인 그즈음 극심한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숙모는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가 속을 박박 긁어놓는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숙모의 푸념이 끝나기 무섭게 함께 앉아 있던 숙모들과 사촌들의 눈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때 난,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다. 그래서 내게 설득을 부탁했을 거다. 아마 숙모는 학교를 그만둔 것에 대한 나의 후회와 반성을 듣고 싶었을 지도.


하지만 당시 내 안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자퇴서를 낸 것에 대한 후회,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마음에 담아둔 생각이 있었다면 오직 한 가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한 학교 밖 청소년이 됐다는 것에 대한 자각 같은 건 없었다. 오직 ‘사라짐’을 기도하고 바랐다. 그건 죽음이라는 것도 포함된 것이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던 사촌동생을 보고 말했다. “너 나처럼 살고 싶니?”      


‘나처럼’이라는 말 안에 담긴 길고 긴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고 묻지 않은 이야기.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됐던 이야기. 그래서 끝내는 숨겨진 이야기들. '말할 수 없음'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 갇힌 시간들은 틈만 나면 나를 갉아먹었다.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생길까, 나는 왜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나? 라는 질문은 얼마 가지 못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너라서, 너는 고작 그런 사람이라서, 너니까’라는 말이 내 키만큼 쌓였을 때 나는 텅 비어 버렸다. 마음에 생긴 커다란 구멍 사이로 삶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날 내가 사촌동생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동생이 나처럼 살지 않길, 누구도 나처럼 살지 않길 나는 바랐다. ‘나처럼’ 안에 담긴 절망, 모욕, 수치, 비루함, 슬픔, 불안, 우울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길 바랐다. 


생각지 못한 내 말에 거실 가득 정적이 맴돌았다. 그때 둘째 삼촌의 아들, 나보다 한 살이 많았던 사촌오빠가 말했다. “네가 뭐 어때서?”라고. 한 번 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놀라서 그랬을 거다. 나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지금도 종종 그날을 생각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인간이 되어 바닥을 기고 있을 때 나를 향했던 한 마디의 말. "네가 뭐 어때서?"

      



어릴 적, 매일이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뭐든 다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무얼 잘하는지 상관없이 가수가 되고 싶었고,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고민하지 않고 꿈꿨던 시간, 무서울 것이 없어 하늘까지 뚫고 날아갈 것 같았던 시간. 아마도 그때 내 안엔 ‘내가 뭐 어때서’랑 비슷한 결의 문장이 들어있었을 거다. ‘난 뭐든 할 수 있어’따위 같은. 그때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나처럼’이란 말 안에 담긴 불행의 조각들이 처음부터 내 안에 있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나라서, 나니까 가져야 했던 게 아니라 나와는 상관없이 내 손에 쥐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날 밤 나는, 사촌 오빠가 했던 말을 어둡고 캄캄한 내 방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 말을 곱씹었다. 그래, 내가 뭐 어때서, 내가 뭐, 대체 내가 뭐 어때서. 오래전부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오래도록 그 말을 되내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폭력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의도하지 않는 순간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폭력들이 삶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때가 있다. 하지만 물리적 상처보다 아픈 건 언제나 ‘말’이었다. 하고 싶은 말,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언제나 필요한 말들의 자리를 쉽게 빼앗아 갔다. 


오직 사라짐을 바랐던 열일곱, 아침부터 저녁까지 커튼이 걷히지 않았던 캄캄한 방 안엔 수많은 말들이 방안을 가득 채웠었다. 그곳에 내게 필요한 말, 듣고 싶었던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다는 말, 그럴싸한 말,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만 가득했다. 그 방으로 사촌오빠의 말들 들고 왔을 때, 나는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직접 서점에 나가 검정고시 문제집을 샀고 3개월 후 졸업장을 가질 수 있었다.      


사촌 오빠는 모른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갔던 시간, 책상에 앉아 내가 곱씹었던 오빠의 말을. 그 말이 진창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던 내게 방패가 되어 줬다는 걸. 오빠가 했던 그 말이 맞길 바라면서 매일 아침 책상에 앉을 수 있었던 시간을.      


나를, 내 삶을 지지해주는 누군가의 말에 기대지 않아도 홀로 설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직도 난 그런 말들을 기다리며 산다. 너무 빨리 텅 비어버린 마음에 아직도 메꾸지 못한 구멍들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작은 구멍들로 자꾸만 새어버리는 삶이 겨우 일어선 내 발목을 잡아챌 때마다 그런 말들을 기다린다.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넌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말들을. 그리고 끊임없이 갈구한다. 누군가 나를 애정 하길,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길, 내게 곁을 내어주길......      


그날 나를 향했던 사촌 오빠의 말은 김려령의 소설 <가시고백>에 나오던 해철의 목소리를 닮았다. ‘사람이 사람을 움직여야지, 그게 진리야’라고 말했던 해철의 목소리를.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일 수 있다던 해철의 단단한 말을. 나는 그런 해철의 말을 믿는다. 나를 할퀴고 지나간 수많은 말 보다, 순간일 지라도 나를 스쳤던 내게 필요했던 말들의 힘을 믿는다. 온전히 나를 채울 만큼 많이 갖진 못한 말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는 말. 몇 발자국 이나마 삶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었던 따뜻했던 말. 그 말에 기대어 오늘도 한 발 나아가본다.                                              


                    



작가의 이전글 거짓은 화목하지 않은 가정보다 화목한 가정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