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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Oct 26. 2022

떨어진 마음을 주웠다.

나를 안아주는 일. 

마음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지는 날이 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데 교문 밖 어디에도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처럼. 


집에는 가야 하는데 비는 맞기 싫고, 엄마는 오지 못할 것 같은 확신이 들면서도 혹시나 올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신발장 앞을 떠나지 못하던 날처럼 말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비를 맞고 집에 가면 젖은 머리칼보다 커다란 눈에서 더 많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었다. 우산도 챙겨주지도 않고, 마중도 나오지 않은 엄마가 미워 울었지만, 조금 울고 나면 금방 괜찮아졌다. 젖은 신발도 탁탁 털어 세워두고, 화장실에 들어가 씻은 후 옷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어 간식을 꺼내먹고 있다 보면 엄마가 왔으니까.     

 

어릴 땐 참 그게 잘됐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두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그렇게 하는 게 맞고 틀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부터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동동거리는 두발을 멈추는 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어릴 적 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살아온 세월만큼 단단해지면 좋으련만 쉽게 압도당하고 쉽게 무너진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 이를테면 어그러진 인간관계처럼 혼자만의 노력으론 되돌릴 수 없는 일조차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붙들고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머릿속을 휘저어 놓은 단어 하나, 눈빛 하나가 마음에 걸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통째로 날아가기 일쑤다.    

  

정답이 있는 일 보다 없는 일들이 더 많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생각을 멈추는 일 앞에선 여전히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한다. 간식을 먹다 보면 집으로 오던 엄마처럼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 그럴싸한 정답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단 이젠 누구도 나를 안도시켜줄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이처럼 그렇게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책임지며 살아야 하는 어른이라서.    

 


오늘 난, 하루를 밀어내고 결국엔 날 넘어뜨리고 말겠다고 덤비는 말들과 힘겨루기를 했다. 그럴 때면 언제고 등장하는 내 안에 도덕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크고 선명한 잣대로 나를 공격했다. 이해하는 사람, 한 발 물러나는 사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쿨하게 넘길 줄도 아는, 이를테면 ‘좋은 사람’ 같은 것. 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마터면 그 말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좋은 사람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게 맞는 것 같아서 ‘그래그래’ 하고 쿨한 척,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을 위선적인 선의를 베풀 뻔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은 매번 넘어지는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야, 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생각의 끈을 잘라 버렸다. 그리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머리를 감고, 설거지를 하고,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 한 권을 들고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갔다. 약속된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먼저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꼼짝없이 앉아 책을 읽었다.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파기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또 들으면서 나를 밀어내려 덤빈 말들을 다 찢어버렸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다. 다만 어쩌지 못하는 일에 압도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밀어내는 말들에 걸려 넘어지고 싶지 않았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냥 '내가 맞아, 내가 옳아'라는 마음으로 내 하루를 지켜내고 싶었다. 금방 부러질 마음이라도 내 편이 되어 나를 안아주고 싶었다. 기다리면 언제고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안아주던 엄마처럼, 그냥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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