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니 습관처럼 또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침이면 더 그렇다. 별일 없이 무사한 하루 뒤에 맞이하는 아침인데도 빨리 씻고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다. 물론, 그 무언가는 읽기와 쓰기다. 그게 아니라면 읽었던 책을 다시 봐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이것저것 많은 책을 읽었지만 망각의 나라로 흘러가버린 것들을 다시 붙잡아 와야 할 것 같아서다. 나를 채우며 산다고 살았는데 막상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접어두었던 책의 한 페이지나, 짧은 문장, 나를 흔들었던 단어 하나라도 내 안에 단단히 붙들어 매 두고 싶다. 누가 묻거나 툭 건들기만 해도 술술술 이야기할 수 있는 장면이 몇 개 있다면 덜 외로울 것 같아서.
엄마의 삶이 참 그렇다.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다는 말을 메고 서서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지만, 누구도 선뜻 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또 하루, 조금만 더를 말하다 보면 아이는 자라고 엄마는 쪼그라든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엄마를 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잰걸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살아도 마음이 무사하지 않은 밤이 더 많은 건 그 때문일 거다.
이를 악물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찾아봐도 '나'를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승리의 깃발을 쥐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도리스 레싱의 말처럼, '주어졌지만 온전히 주어지지 않은 시간' 그 안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는지. 그러다 툭'하고 나가떨어지면 사는 게 얼마나 진절머리 나게 싫어지는지.
얼버무리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걸 갖고 싶어 안달이 났던 때가 있었다. 사계절 내내 농사일로 바쁜 남편을 뒤로하고 혼자 아이 넷을 보면서 한두 시간 만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싶었다. 모두가 잠든 밤이 아니라 해가 쨍하고 뜬,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그 시간에 나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울었다. 그렇게 울다 기다렸다. 아이가 조금만 더 빨리 자라기를. 그때 난, 아이가 너무 예뻐서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는 말이 제일 싫었다.
지금 아이들은 모두 초등학생이 됐지만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차량 운행이 되질 않는 학원 때문에 매일 데려다 주고데리고 와야 한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도 다 달라 동선도 제 각각이다. 겹치지 않게 스케줄을 조정하고, 저녁을 두 번 이상 차린다. 들어오는 시간이 다르니 어지르는 시간도 달라 청소는 해도 끝이 없다. 그렇게 산다. 아이가 크면 좀 나아진다는 건 희망사항일 뿐. 그래서 아직도 난, 해가 떠 있을 때 보다 졌을 때 더 분주해진다. 그것마저 피곤에 몸을 내어주는 날이면 이도 저도 아닌 하루가 그냥 또 흘러간다.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요즘 들어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게 된다. 내가 쓴 나의 모습은 어떤 장면에선 익숙하고 어떤 장면에선 낯설다. 맞아, 그땐 그랬지 하다가도 어휴 뭐 이렇게 까지 하기도 한다. 너무 뻔한 이야기들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뻔한 일상을 열심히 살아낸 나를 보게 될 때면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김수미 선생님의 오래된 에세이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일기를 쓰세요. 문장력 개떡 같으면 어떻습니까" 하고. 이유인즉슨 일기장 속엔 개 같은 남편 원수 같은 남편도 있지만, 좋았던 날의 남편도 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글은 그런 힘이 있다. 사는 게 힘들고 지쳐서 썼던 글이지만 그 안엔 아픔과 반대되는 것들이 꼭 들어있었다. 글은 항상 무엇을 남겨두고 붙들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원수 같은 남편과 보냈던 좋았던 날처럼,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도 그랬다. 불안한 마음에 아침부터 일찍 도서관에 갔다, 차에서 책을 읽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브런치를 기웃거리다 찬찬히 내가 썼던 글을 읽었다. 나는 텅 비어있지 않았다. 극과 극을 달리면서도 애써서 웃었고, 다시 일어섰고, 무사한 밤과 아침을 보냈다. 나이 탓 인지, 머리 탓인지 망각의 숲으로 흘러간 수많은 이야기들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읽고 또 읽으니 그정도면 됐다 싶다.
연말이 다가오지만, 아직은 2022년이 두 달이나 남았다. 나는 '연말'이 아닌 남은 '두 달'의 손을 잡아야지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벼리는 일, 좀 더 나은 내가 되어야겠다는 강박에서도 한 발 물러나 보자 생각한다. 다리를 달달 떨며 입술을 뜯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그래, 연말이 뭐 별건가. '일상의 열심히' 그 자세로 그냥 그렇게 보내면 되는 거지 뭐. 그러니 섣불리 마무리 짓지 말고 남은 시간을 충분히 살아내자. 가끔은 그렇게 뻔한 게 더 나을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