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복숭아 포장이 끝나면 가자던 부석사를 다녀왔다. 울긋불긋 단풍 진 가로수들을 지나 부석사에 오르니 노란 은행나무들이 환히 빛났다. 날씨는 또 얼마나 좋은지, 하늘은 파랗고 따뜻한 가을 햇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아침 일찍 아이들을 보내고 집 안 정리를 하고 나오느라 분주했던 마음은 간데 없이 걷는 걸음마다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진짜 예쁘다."
매표소 앞에서 약재를 넣어 푹 끓인 어묵 하나씩을 먹고, 오르는 길 내내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브이 좀 그만하라는 타박을 받으면서도 계속 브이를 했고, 숨이 차 헥헥거리면서도 떠들었다.친구는 의상대사를 사모했던 선묘 낭자의 설화이야기를 하다, 결국 선묘의 사랑이 여성의 희생을 뜻하는 것 같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양육자의 스트레스 해소 필요성을 말하던 친구. 작고 귀여운 모자를 짧은 머리 위에 걸치고 조금은 뚱한 표정으로 심오한 이야기들을 일상처럼 풀어내는 친구가 귀여워 웃었다. 심각하지 않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친구의 말은, 쉽게 흩어지지 않고 내 안에 머물다 편협한 시야를 조금씩 넓혀준다. 나는 그런 친구의 말이 좋다.
가을의 부석사는 올해도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떨어지는 낙엽소리, 높은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숨소리, 사랑하는 이를 찍어주는 카메라 셔터 소리, 작은 웅성거림, 사과와 말린 나물을 파시는 할머니들의 수다 떠는소리,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 소리는마음에 기분 좋은 파동을 만들어 주었다.
다리가 아프다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휘휘 걷는 친구, 예쁜 손수건으로 콧잔등에 땀을 닦아내며 걷는 친구, 걸음이 빨라 천천히 좀 가라는 소리를 만날 들으면서도 성큼성큼 앞서 걷고 마는 나. 우린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른 거 같은데 또 통한다. 걷는 속도도, 옷을 입는 취향도, 좋아하는 향도, 음식도, 술도 조금씩 다 다르지만 만나면 함께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게 참 좋다. 어쨌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럼에도 만나면 만날 수록 같아지는 게 아니라, 내가 될 수 있어서 좋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곁을 내어주고, 가깝게 지내지만 온전한 하나가 아니라서 좋다. 너는 너, 나는 나 서로의 모습 그대로 일 수 있어서.
한 시간가량 가을을 만끽하고 내려와 밑반찬이 많이 나오는 백반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부석사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카페 밖에 만들어놓은 작은 상점에서 모양은 같지만 색이 다른 양말 세 켤레를 사서 하나씩 나눠 가졌다. 빈티지 옷과 작은 액세서리 따위도 구경했다. 친구는 바람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주워 이리저리 만지더니 예쁜 나비를 만들었다. 손끝이 야무진 친구가 만들어 내는 건, 늘 놀랍게 정교하고 예쁘다.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함께 할 수 있을까 하고. 사람 마음이란 게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친구의 마음과 내 마음이 언제까지 서로를 향해 열려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래서 가끔은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 뒤에 작은 불안이 따라올 때가 있다. 그럼에도 벌써 5년이 지났다. 뒤뚱 거리며 걷던 아가들이 책가방을 메고 뛰어다닐 만큼의 시간을 함께 통과한 거다. 그 아이들이 자라 교복을 입고, 대학을 가거나 취직을 할 때까지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먼 미래니까 생각하지 않으련다. 즐거웠던 오늘이면 충분하다. 오늘이 있어야 내일도 있는 거니까.
친구들과 헤어지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자동차 앞 유리창에 후드득 떨어지는 낙엽 소리를 들으니 충만해진 마음이 흘러넘쳐버렸다. "얘들아, 하늘 좀 봐. 구름이 너무 예쁘지 않니?" "우리가 지금 은행나무 숲을 건너는 것 같지 않아?" 아이는 만화책에 코를 박은 채 내 말은 듣지도 않는데, 나는 내내 혼자 떠들었다.
집에 오니 친구가 카톡으로 80장의 사진을 보내줬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눈을 감던 내가 오늘은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았다. 쭈뼛거리는 몸뚱이는 그대로지만 좋다고 웃었다.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