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Nov 04. 2022

'나는'을 쓰지 않으려고 '나는'을 쓴다.

나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육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를 찾겠다고 발버둥 치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때,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고 보이지 않던 불평등한 일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남편이 말했다. 제발 말끝마다 '나는'이라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그 말이 너무 듣기 싫다고. 덧붙여 페미니즘 관련한 책을 그만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그때 우린 중요한 사안을 두고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아이를 재우고 거실에 앉아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더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뜬금없이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세 기분이 상했다. 그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면 "제발 조용히 좀 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부터 유독 '나는'이라는 말을 붙여 말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 말이 이기적으로 들린다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내 생각만 중요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 근데 나는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말할 거야. 그러니까 그냥 당신이 적응해"라고 쏘아붙이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날은 밤새 잠이 오질 않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자꾸만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 따지고 싶었다. '나는'이라는 말이 대체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고.



이제와 돌아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전까지 나는 한 번도 내 생각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나는'이라는 말을 붙여했던 말이라곤, 돈가스나 불고기처럼 외식메뉴를 정하거나, 옷이나 이불 따위를 고르는 일처럼 남편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기혼여성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에 최적화된 말들. 이를테면 "곧 어머니 생신인데 집으로 모셔서 식사 대접할까?" 같은 말. 당연하지 않은데 당연하게 기대되는 말. 그래서 환영받고 고마운 예쁜 말들만 했었다.


하지만 밖으로 드러난 말 뒤엔 언제나 하지 못한 수많은 말들이 있었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삼킨 말, 때론 할 수 없어서 뭉개버린 말. 그 말들을 모아 들여다보니 잘개 쪼개진 내가 보였다.

타인의 발 끝에 간신히 매달려 그림자로만 존재하던 투명하고 어두운 나. 유년시절부터 이제껏 주욱 그렇게 살아서 실은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어른이 돼버린 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참을 생각하다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점이 어디든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림자가 아니라 빛이 되고 싶었다. 정해진 말 보다 해야만 하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내 안에 고인 말들을 모조리 밖으로 꺼내 '나'라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투명하지 않은 나, 거칠고 뜨겁고 사납게 살아있는 나를 밖으로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을 거다. 그런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자꾸만 '나는'이라는 말로 나를 드러내려 했을 거다.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럴듯하고 거창하게 꾸민 나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을 거다. '나는 말이야' 하고. 그러니 얼마나 꼴 보기 싫었을까.



지금도 나는 '나는'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시간 탓인지, 이해의 결과인지 남편은 더는 내게 '나는'이라는 말로 트집을 잡지 않는다. 되려 '고운 네 생각은 어때?' 라며 자주 묻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나는'이라는 말을 수천 번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변방이 아닌 삶의 중심에서 말하고, 보고, 웃고, 걷고, 뛰며 존재하는 나를 질리도록 마주할 수 있어야 '나'를 벗어난 다른 것 앞에서도 진실된 눈과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지금 난, '쪼개진 나'라는 퍼즐을 맞추는 중이다. 수도 없이 '나는'이라는 말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찾아가는 중이라고 해두자.


우울과 불안이 짙어 종종 베베 꼬이고 비틀어지는 때도 있지만 그 또한 살아있음에 대한 생생한 증거라 내치지 않는다. 더디고 서툴고 느린 것은 그만큼 더 자랄 수 있는 것이라 꼴 같잖은 위로를 하면서 눈 꼭 감고 끌어안는다. 비어있던 시간이 길었으니 채우는 시간도 긴 것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삼키고 뭉갰던 모든 말들이 이야기가 되는 날까지 나는, '나는'이란 말을 주야장천 할 것만 같다.

작가의 이전글 좋다고 웃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