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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Nov 08. 2022

이해고 나발이고,

나부터 정신 차리기.

"아, 진짜 이해가 안 가."

      

친구들과 이른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주고받다 나온 말이다. 같은 말은 띄엄띄엄 서너 번 반복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꽉 닫힌 내 마음을. 삶 이란 게 본래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인데 대체 왜 난 이 딴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싶어 불쑥 짜증이 났다. 또 뭐가 문제인지, 뭐가 맘에 안 들어 꽁하니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있는지, 왜 맛있는 밥을 먹고 웃고 떠들면서도 스스로를 한심하다 자책하고 있는지.

     



아침엔 식탁 밑에 우유를 쏟으면서 옷을 다 적신 아이 때문에 화가 나고, 어제는 저녁밥을 세 번 차리다 주방에서 인생이 끝날 것 같은 마음에 화가 나고, 글쓰기 모임에 제출해야 하는 글이 마음에 안 들어 화가 나고, 화장실 개수구에 뭉쳐진 머리카락이나, 카펫 위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에 화가 나고, 자꾸 화가 나는 나 때문에 화가 나서 하릴없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으니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대체 어떻게 살았던 걸까. 그 긴 세월 시어머니를 모시고, 둘이나 되는 시누이 뒤치닥 거리를 하고, 아버지와 언니와 나를 견디면서 매일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하고, 밖에 나가 일을 하면서 엄마는 대체 무얼 보고, 무얼 기대하며, 무얼 위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결국 마음에 지저분한 바람이 부는 건, 되돌이표처럼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엄마’라는 삶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늘 엄마가 떠오르니까. 그때도 엄마였고, 지금도 엄마고, 앞으로도 엄마일 거고, 죽어서도 엄마로 기억될 나의 엄마. 그리고 엄마처럼 그렇게 '엄마'로 살아갈 나.

     

대체 어쩌자고 난, 겁도 없이 애를 넷이나 낳아서 육체와 정신을 이렇게 갉아먹고 살까 하는 생각을 오늘까지 수 천 번째 하고 있지만, 역시나 이런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래 봤자  이미 결혼을 했고 애를 넷이나 낳았다는 명확한 사실과, 그건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답만 메아리처럼 되돌아올 뿐이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고꾸라지는 일에 이렇게 적응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대체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건지. 지금 시점에서 제일 이해가 안 가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데(쯧쯧쯧).   

  

엄마로 살아온 12년의 세월이 내공이 되기엔 아직 부족한 걸까? 좀체 ‘엄마’의 삶에 연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려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살다가도 불쑥 올라오는 내 안에 화를 잠재울 수가 없다. 어디서 어떻게 오는 화인지, 그게 정말 ‘엄마’라는 이름 때문인지, 그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나’라는 인간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열심히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고, 가끔은 술도 먹고, 시끄럽게 웃고 떠들어 보지만 무얼 해도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만족감이나, 심리적 안정감은 매번 이렇게 날 우울하게 만든다. 좋거나 아님 나쁘거나. 전생에 나는 과학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자석이었을까? 무슨 인간이 이렇게 극과 극인지. 감정도, 생각도, 계획도, 하는 짓도 하나같이 다 어쩜 이모양인지.  

   

뭘 해도 세상 끝으로 밀려나는 느낌.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불안함. 그래서 결국엔 집 안에서 늙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버글거린다. 징그럽게 꿈꾸고, 징그럽게 좌절하고, 징그럽게 우울과 불안을 오가며, 징그럽게 산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일어나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씻고, 책을 좀 읽다, 핸드폰 화면에 뜬 ‘이를 악 물고 살아만 있어라’라는 말에 매달려 또 하루를 산다. 그래도 발 끝이 땅 밑으로 푹푹 꺼지는 날이면 읽었던 책을 스무 권쯤 꺼내 쌓아두고 후루룩 넘기며 언젠가 내가 밑줄 그어놨던 문장만 골라 빠르게 읽는다. 그러다 쿵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이 있으면 소리 내어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그때 의 나, 비슷한 우울에 걸려 넘어졌지만 일어났던 나를 기억해 내고 싶어서. 그렇게 다시 또 괜찮을 며칠의 하루를 얻어 살아내고 싶어서 가만히 앉아 내 목소리로 방 안을, 구멍 난 마음을 채운다.    

 

'비틀어진 나뭇가지는 햇살을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움직였다는 증거'가 아니겠냐던 어느 책 속의 문장을 기억한다. 내가 이토록 비틀어진 것도 햇살을 향해 몸부림쳤던 나뭇가지처럼, 삶에 가닿기 위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툭하면 서러움에 몸부림치다 나가떨어지지만 그렇게 라도 내가 원하는 삶에 닿을 수 있다면 말이다.


사는 게 이렇게 징그럽다. 허점투성이에 무르고 무른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그래서 다시 또 넘어질 줄 알면서도 끝내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나니까. 사는 게 뭐 별거냐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만이지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면서도 한 번은 빛나는 사람이고 싶어서.


다짐과 벼랑.

오늘도 그 사이를 헤매다 보니 하루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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