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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Nov 09. 2022

불온한 사랑.

끝내는 알 수 없는.


며칠 전, 저녁 늦게 아이와 길을 걷다 홀로 노래를 부르며 걷는 중년의 아저씨를 보았다.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건, 그 노래가 어릴 적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면  불렀던 팝송 <my way>였기 때문이다. 아버진 술 취한 날이면 꼭 거실에 앉아 그 노래를 불렀다. 어떤 날은 노래가 끝난 뒤 방문을 열고 자는 척 누워있던 언니와 나를 들여다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몇 번이고 같은 노래를 반복해 부르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이나 빵 따위를 양손 가득 사 들고 오신 날엔 식탁에 앉아 금박 종이에 쌓인 엑설런트를 베어 먹으면서 혹은 커다란 공갈빵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면서 식탁에 앉아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다. 왜 저렇게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지, 노래는 왜 또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마음을 내어 아버지의 하루를 떠올려 보기엔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 아버지의 자리는 너무 작고 협소해서 애써 내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너무 커다랗고, 너무 멀고, 그래서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흘려듣고 잊어버렸던 노래를, 그때의 나만큼 자란 내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걷다 들었다. 낯선 아저씨의 목소리는 무대 위에서 입을 동그랗게 모아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처럼 깊고 짙게 울려 퍼졌다. 보도블록 옆, 불 꺼진 작은 상가들을 여럿 지나쳐 아파트 후문에 도착하기까지 아저씨는 그날의 아버지처럼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문득,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늦은 밤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가사처럼 사랑했고, 웃고, 울고, 때론 후회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거쳐간 삶을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불렀던 걸까? 어른들은 우는 게 창피해서 울고 싶어질 때면 노래를 부른다는데, 아버지도 울고 싶었던 걸까?     


 

어릴 땐 아무것도 몰라서, 사춘기를 통과하면서는 아버지가 미워서, 어른이 되어선 모르면 좋았을 것을 나도 모르게 알아버려서 아버지를 향한 마음은 더는 손 쓸 수 없이 복잡하게 엉켜버린 실타래가 되었다. 풀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 마음이 좀 괜찮은 날엔 엉망이 된 실타래를 붙들고 풀어보려 애쓰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원망이 너무 많이 자라서인지 그런 애씀은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거품처럼 금세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애씀과 포기, 기대와 실망을 오가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발견했을 땐 그냥 툭 놓아버렸다. 망가진대로, 엉킨 채로, 해지고 찢긴 마음 그대로 놓아두고 살아보자고. 가족이 꼭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아버지란 이름도 누군가에겐 상처나 비극으로 자리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난, 그런 마음으로 아버지를 본다. 다정했다 사나워지는 아버지, 허허실실 웃다 금세 얼굴이 일그러지는 아버지, 말과 행동이 다른 아버지, 여전히 너무 크고 먼 아버지를 미워하고 싶은 날엔 마음껏 미워하고, 마음을 열고 싶은 날엔 웃어 보이기도 하면서 나쁘면 나쁜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그날그날의 감정만큼만 아버지를 본다. 지나간 시간을 끌어다 놓는 일도, 어설픈 가족주의에 기대 미래를 낙관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최선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까. 더욱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 에선 서로에게 가닿지 않는 최선이 너무 많다. 그래서 최선을 다 하고도 서로의 등을 보고 사는 것이겠지.      


이제와 드는 생각이지만, 나에겐 최선이 아니었던 것들도 아버지에겐 최선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궁금해하지 않았던, 그래서 끝내 몰랐던 아버지의 수많은 하루들을 지금도 나는 알지 못하니까.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던 날 아버지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울고 싶었다면 왜 그랬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고 맞이하는 저녁이었는지, 끝내 알지 못할 테니까. 커다란 손으로 따귀를 때리던 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을 마구 쏟아내던 날, 무섭게 나를 노려 보던 날. 그런 수많은 날 아버지가 보냈을 어떤 하루에 대해서.      


아는 게 있다면 검은 봉지 안을 가득 채웠던 공갈빵과 엑설런트의 달콤함, 뜨겁고 매웠던 커다란 손과 거친 말들이 만들어냈던 날카로운 맛뿐이다. 그 극과 극 어딘가에서 아버지는 길을 잃어버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내 안의 화가 아이들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몰라서 쾅하고 방문을 닫아버리거나, 세탁기 안에 빨래를 던져 넣고 이불속에 머리를 처박고 마는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아버지가 지금도 그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다. 술에 취한 밤이 얼마나 많은지, 노래를 부르다 소파에 고꾸라져 잠드는 밤이 아직도 있는지...... 아이들이 잠든 밤, <my way>를 몇 번이고 돌려 들어보지만 끝내 알 수가 없어서 아버진 여전히 내게 상처고, 어두운 그림자고, 눈물이고, 고통이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에게로 간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끝내는 알 수 없는 일들과, 지나간 시간과, 되돌릴 수 없는 상처와, 남겨진 시간을 그러모아 너무 애쓰지 않아도 내디딜 수 있을 만큼의 걸음과 속도로. 과거는 너무 생생하고, 다가올 미래는 알 수가 없어서 망가진 그대로 그렇게, 불온하게, 제 멋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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