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아침, 밤에 쌓아둔 설거지를 하다 나도 모르게 청소도구를 꺼내 싱크대를 닦기 시작했다. 싱크대 상판이 끈적거려 여기만 닦아야지 했다가 벽면의 타일과 후드 위, 가스레인지와 싱크대 손잡이 주변 얼룩까지 박박 문질러 닦았다. 닦고 나니 하얗던 극세사 수세미가 묶은 때를 얼마나 먹었는지 걸레가 되어 버렸다. 최근 난, 며칠 내 이불을 빨았고, 책장 정리를 했고, 재활용 스티커 사러 가는 게 귀찮아 현관 앞에 두었던 저상형 침대틀도 스티커를 붙여 내다 버렸다. 아이들 방구석구석에 쌓인 오만 잡동사니를 치우고 창틀에 먼지도 닦아냈다. 그러고 나서 싱크대를 닦았다. 설명하기 힘든 우울과 한숨에 잡힌 덜미를 풀어내기 위한 최선, 그것이 내겐 청소라서 닦고 또 닦았다.
바깥은 찬 바람이 불지만 앞뒤 창문을 다 열어놓고 발바닥이 뜨거워질 때까지 서른다섯 평의 공간을 종종걸음으로 걷고 또 걷는다.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 방울이 맺힐 때까지 게으른 육체를 혹사시킨다. 그렇게라도 해서 깨끗해진 집을 휙 둘러보면 잠깐이지만 나란 인간도 그렇게 쓸모없게 느껴지지 않는다. 짧지만 즉각적인 각성의 시간이다.
한창 에릭 프롬에 빠져 살았을 때, '인간의 본질은 질문이다'라는 그의 말을 써서 노트 앞에 붙여 놓았다. 세상에나, 질문이라니. 그건 사랑, 만끽, 충만함처럼 너무 낯설고 이질적인 말이라 스스로는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말이었다. 심지어 그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그 문장을 맞닥뜨렸을 때 내 안에선 작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혼돈과 희망이 적절하게 배합된, 두렵지만 설렘과 기대를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바람.
그때 난, 무지막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나를 찾겠다는 일념과 한 번쯤은 삶을 만끽해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겁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한 2년 정도는 꽤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거짓 없이 내 삶을 대면하는 건, 자주 가슴이 뻐근해지는 힘든 일이지만 견디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결과보단 과정이라는 말에 기대어 버텼다. 어리석게도확신했었다. 드라마틱하게 변화될 삶을.
나는 이렇게 현실감각이 없다. 사람들이 심심할 때 침대에 뒹굴거리며 하는 상상을 하면서 그게 현실이 되길 바랐다. 지나치게 자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꿈을 꿨다. 삶을 경멸하면서 만끽하고 싶어 했다. 결과를 얻고 싶어서 과정을 중요시 여겼다. 아니면서 그런 척. 척. 척. 척. 과장되게. 그러다 알게 알았다. 삶은 쉽게 변하지 않고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않는 다는 걸.
현실에서 불행은 (상처라 불리는 것들) 사람을 빛나게 해주지 않는다. 불행의 그림자가 있어 더 빛나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은 소설 속에나 등장했다. 불행은 거추장스러운 그림자일 뿐이다. 불쑥 나타나 등허리를 후려치고 발목을 꺾어버리는 무섭고 끈질긴 것. 그래서 끝내는 삶과 친해지기 글러먹은 삶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마는 지독한 것.
삶이 참 연극 같다는 생각을 한다.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선도, 잘 달리다가도 멈추고 서성이고 뒷걸음치게 만드는 내 안의 우물도, 자학의 끝을 달리면서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시효가 짧은 걸 알면서도 힘 있는 몇 줄의 글을 읽으려고 수시로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징그러운 습관도,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사랑을 말하고, 사랑한다는 아이들의 말에 묵직해지고 마는 가슴이나 갓잖은 글 솜씨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종종 밤잠을 설치는 허무맹랑한 마음까지 모두. 삶은 모순투성이라지만 모르겠다. 삼류 나부랭이 같은 삶 앞에서 한숨만 푹푹 내쉴뿐.......
일부러 건조기에 넣지 않고 기다란 건조대 위에 널어둔 이불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기를 좋아한다. 장롱을 열고 이불을 정리할 때면 깨끗해진 베갯잇과 보송보송한 이불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는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준다. 솔질로 박박 문대 하얘진 아이들 양말의 뒤꿈치를 볼 때도 기분이 좋다. 세면대 손잡이의 반짝 거림도, 부스러기 없이 깨끗한 식탁 밑도, 잘 정리된 냉장고도, 반듯하게 정리한 침구를 보는 것 모두. 그런 순간엔 가슴 밑바닥에서 웅얼거리는 사나운 악다구니도 들리지 않는다. 무기력한 삶에 따라붙는 두려움이나 불안도 없다. 돌아서면 또 금방 무너질지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삶이 볼품없어 보이지 않는다.
견딘다는 건 그런 걸까? 저 멀리가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듯 주어진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 하루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하루는 식구들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하고, 하루는 강변을 걷고,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밥을 먹고,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앉아 영화를 보고, 하루는 도서관을 가고. 거창하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는 시간을 쌓아가는 것.
잠깐의 기쁨에 기대 지나치게 삶을 미화하지 않고, 잠깐의 우울에 기대 지나치게 삶을 증오하지 않는 것. 누구나 할 법한 일, 그게 몸을 씻는 것이나, 밥을 먹고 앉아 티브이를 보는 것처럼 통속적인(?) 일이라 해도 과장된 하루를 꿈꾸는 것보단 더 나은 일이 되는 걸까? 하긴, 삶은 때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여 특별한 것을 만들어 낼 때도 있으니까.
결국 난 이런 사람이다. 그늘진 내 이마 위에 햇볕을 얹어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사람. '삶이 뭐 이래' 조소하고 비아냥 거리면서도 창틀의 먼지를 닦아내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는 휘적휘적 걸어가 침대 안으로 다시 몸을 숨기는 사람. 그러다가도 일어나 밥을 먹고 책을 읽는 사람. 그래서 사는 건 무서운 일인지 모르겠다.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지금도 보인다. 이렇게 말하고도 다시 현실을 등지고 꿈속에서 허우적거릴 내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싱크대 앞에서 손목이 후달리도록 수세미질을 하고 있을 내가. 어쩌면 그것이 내겐 가장 통속적인 삶의 구조인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