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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Nov 17. 2022

각자도생.

나 하나 잘 살기도 힘들어서.

어떤 책을 읽고 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난, 내가 자식을 낳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마음엔 변화가 없다. 내 속으로 낳았다는 것, 입덧과 어지러움, 저녁이면 부어오르던 발목, 아이를 하나 낳을 때마다 깊어진 허리 통증, 막달이면 몸을 뒤척일 때마다 뭉쳤던 배와, 수시로 들락거리던 화장실 같은 것을 떠올릴 때면 내 안에 작은 씻앗하나가 움트기 때문이다. 그 씨앗은 태어난 아이에게 막중한 임무를 떠넘긴다. 예쁜 아이, 사랑스러운 아이, 똑똑한 아이, 가슴이 따뜻한 아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낳았으니 탁월한 사람이 되어 엄마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는 임무 말이다.      


나는 그랬다. 포동포동한 아이의 볼에 얼굴을 비비면서, 작은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해가 잘 드는 곳에 앉아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앙증맞은 몸을 씻기고 예쁜 옷을 입혀 주면서 수시로 아이의 삶을 상상하곤 했다. 상상 속에 존재했던 아이의 삶은 언제나 폼나고 멋진 것들 뿐이었다. 아닌 척 했을 뿐, 내 아이가 옆집 아이보다, 친구의 아이보다, 학교의 수많은 다른 친구들보다 특별하게 빛나길 바랐다. 그러다 책을 읽고 알았다. 자식을 향한 욕심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 나를 견디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걸 알고부터는 아이들을 향했던 관심을 내게 돌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육아서 대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은 엄마가 아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고민했다.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조금 덜 치우면서 남는 시간은 무조건 나를 위해 썼다. 육아용품과 장난감만 가득했던 집 한 구석에 나를 위한 공간도 만들었다.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고, 강의도 듣고,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      



혼자 씻었다고 웃으며 걸어 나오는 아이의 머리에 샴푸 거품이 남아 있어도, 방금 닦은 손에서 구정물이 뚝뚝 떨어져도, 늑장을 부리다 세수를 못하고 어린이집에 가도, 양말을 짝짝이로 신어도 내버려 뒀다.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서툴러도 혼자 하게 두었다. 밥을 하고, 계절에 맞는 옷을 꺼내 주고, 병원에 가는 것처럼 아이의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해줬다. 그래도 아이는 잘 자랐다. 건강했고, 잘 웃었고, 잘 먹었고, 잘 놀았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에 가끔은 묘한 죄책감과 불안이 따라붙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편안했고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간다.      


심윤경 작가의 책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식 문제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 안 쓰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이 말은 정말 맞다. 자식과 거리를 두는 것, 아이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것, 자식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지만 내 안엔 또 다른 말이 존재한다. “누군가를 더 깊이, 오래 사랑하기 위해선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정여울 작가의 말.      


전자가 너무 맞는 말이라, 나는 후자의 말을 더 많이 떠올리고 되뇐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내 삶을 향한 관심을 꺼트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게 어느 정도 관심을 두면 자식 문제만큼이나 머리를 쓰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한마디로 골치가 아프다. 사람답게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그건, 실존(實存)의 문제라 머리를 써 고민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식 문제에 어느 정도는 초연해진다.


내게 너무 몰두해서가 아니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서툰 사람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알면 함부로 참견하거나 조언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게, 내가 가진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서툴게 아이의 삶에 끼어들지 못한다. 나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쩔쩔매는데, 누가 누구를 가르친단 말인가. 육아는 너무 버겁고, 고생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사는 일이다. 그러니 난, 더 힘든 일부터 해결하고 난 다음에 아이의 삶을 들여다볼 작정이다. 그때까진 각자도생.  

   


 

독서모임이 있던 날, 북클럽 멤버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모두 기혼, 유자녀 여성이라 자연스레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모든 이야기의 끝이나 처음엔 아이 때문에 미치겠고, 답답하고, 환장한다는 말이 붙었다. 아이러니 한 건, 그럼에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는 것. 크크크, 큭큭큭.


미치겠고 답답하고 환장하지만 말하고 보면 사실 별거 아닌 일들인 거다. 집 안에서 아이와 둘이 대면할 땐 커다랗게 보이는 것들도, 밖에 나와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다. 대게는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어마 무시한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심윤경 작가의 할머니처럼, 훈육보단 관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경계가 애매해 머리가 지끈거릴 때면 밖으로 나오면 된다. 함께 떠들다 웃을 수 있다면, 관용이 필요한 순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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