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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an 11. 2023

'가족'도 다시 '시작' 할 수 있을까?

한 번쯤은 나도.

작년 여름, 부모님이 다른 지역에서의 귀촌 생활을 접고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몇 달 후, 이제 노인이라 불러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정도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사와 장사 모두 나는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일이라 당황과 염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게 결혼은 원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마음이 크게 작용했던 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이 고향으로 내려가 귀농생활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2년을 부모님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냈다. 그런데 우리 동네로의 이사라니. 게다가 장사까지.     

 

지금도 난, 보이지 않는 가드를 올리고 부모님 앞에 선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 마음엔 해가 들지 않는다. 원망과 미움이 있고 자책과 후회, 설명할 길 없는 긴 슬픔이 있다.  삼킨 말들이 너무 많아 어떤 날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을 구실로 삶에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아 아무 일 없던 척 애쓰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날엔 걷잡을 수 없는 원망에 나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쌓인 절망의 피로는 너무 짙고 무거워서 누굴 만나고 무얼 하던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되려 기꺼운 삶 옆에 선 내 불행을 좀 더 또렷이 마주하게  뿐.      


그래서 될 수 있다면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다. 오래된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나를 놓아주고 싶었다. 그럼 지나간 시간쯤은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이상의 기대나 바람은 없었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원망과 후회 슬픔으로 이어지는 문을 더는 열고 싶지 않았다. 얼마간은 정말 그랬다. 현관문 앞에서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집안의 분위기를 살피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정말 오랜만에 애쓰지 않고 웃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여러 번 열림과 닫힘을 반복했다. 어떤 날은 ‘가족’이란 말을 갖고 싶어 마음을 열었고, 어떤 날은 ‘가족’이란 말이 진저리 나게 싫어서 마음을 닫았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애쓰지 않고 웃는 날이 늘었지만 애써 삼켜야 하는 말은 줄어들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상처받은 마음을 내버려 둘 수 있는 ‘집’을 갖게 됐다는 것. 서럽고 아팠던 기억이 쏟아져도, 원망과 미움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도, 긴장과 방어의 태세를 갖추지 않고 나를 내버려 둘 수 있는 곳 말이다.   


그 안에서 난 그동안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들으려 하지 않았던 말, 애써 상상해 보지 않았던 부모님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가시가 돋아난 몸으로 우산을 들고 걸어간다.


자식이 출가하면 부모는 자식에 대한 기억으로 살아간다던데, 부모님 기억 속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 본다.  미움과 원망이 자라기 전 가졌던 마음도 찾아본다.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행복에 가닿았을 시간들. 살아본 적 없는 삶이고 가져본 적 없는 마음이라 여겼던 것들이 정말로 그러한 건지 내게 묻고 또 묻는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 이를테면 감사나 존경, 사랑과 기쁨 따위를 너는 정말 한 번 도 가져본 적이 없느냐고 묻는다. 상처의 옹이구멍으로만 들여다본 삶이 얼마만큼 진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서러웠던 계절이, 견뎌야 했던 어둠이  쏟아져 내린다. 그렇게 또 한 번 살아온 시간이 쌓인다. 애써 살아낸 시간은 이렇게 자꾸 살아온 시간에 묻혀 버린다. 그럼에도 살아낸 시간이 쌓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애씀의 시간은 지나온 시간앞에 언제나 속수무책 무너져 버린다.



나는 조심스레 '가족' 옆에 '시작'이라는 단어를 적어본다.


가족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서걱서걱했던 마음에 다정하고 따뜻한 진동이 울릴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서로를 배울 수 있을까?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진실로 웃어 보일 수 있을까? 아프지 않고 무덤덤하게 서로를 감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낸 시간을 살아온 시간 위에 쌓을 수 있다면 우리도 정말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을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진실로, 있는 그대로, 그렇게 서로를 지켜볼 수 있을까? 지겹도록 미워하고 원망했던 마음이 다시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지금은 그런 질문보다 기억의 바깥에 서서 당신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일 테니까. 궁금해하지 않았던 당신의 삶. 내가 살아본 적 없고 가져본 적 없는, 그래서 끝내는 완전히 알 수 없을 당신의 삶 말이다. 만약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출발선은 궁금해하지 않았던 서로의 삶 어디쯤이 아닐까. 깨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아무도 몰랐던 어떤 하루의 끝.


더 늦기 전에 그곳에 닿고 싶다. 한 번쯤은 나도 기꺼운 마음과 얼굴로 당신 앞에 서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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