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몇 달의 시간을 보내고 겨우 다시 마음에 ‘시작’이란 단어를 들여다 놓았다. 변덕이 심하고 감정의 널뜀은 그보다 더 한 요란하고 산만한 인간이라 우습게도 ‘또’ 마음이 설렜다. 무언가를 이뤄내지 못하는 읽기와 쓰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만두자 했다가 글쓰기 모임에 나가 다시 ‘시작’이란 단어를 들고 왔으니 이토록 대책 없는 인간이 있을까 싶지만 다시 웃음이 나왔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쓰고 싶었던 글의 소재를 수첩에 적어 두었다. 며칠은 그랬다. 글쓰기에 대한 생각으로 몸과 마음, 머리, 모두가 바빴다. 오랜만에 참 좋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만 나이 시행 덕분에 서른여덟이 되었으니 어쩐지 1년을 거저 얻은 기분이 들었다. 책을 삶에 들여놓은 후 늘 생각했다. 마흔이 되기 전, 그전엔 무엇이 됐든 꼭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고 모든 면에서 더디고 서툰 난, 슬프게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 중이다. 그런데 얼결에 서른여덟이 되고 보니, 그 또한 조금의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엄마의 국밥집이 문을 열었다. 부모님 연세가 많으셔서 당연히 일손을 거들어 드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 두어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몽땅 쏟아야 했다. 개업 전 틈틈이 나가 도왔던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발가락 열 개가 하나하나 땅 속으로 꺼질 것만 같은 육체의 피로에 밤잠을 설쳤다. 자면서도 몇 번이나 발등까지 힘을 줘 다리를 쭉쭉 늘어트리는 스트레칭을 해댔다. 그러다 눈을 뜨면 아이들은 아빠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돌봄 교실에 다녀오겠다며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뛰어나갔다. 벌써 아침.
침대를 겨우 빠져나와 세수를 해도 눈이 잘 떠지질 않았다. 뚝배기와 반찬을 나르고 친절한 인사를 쉼 없이 건네기 위해 잔뜩 긴장을 한 탓도 있겠지만, 작은 식당 안을 종종거리며 다니는 것이 이토록 피곤한 일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전업주부 12년 차, 청소며 살림에는 도가 튼 만랩주부의 명함이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늦은밤, 앞치마를 입은 채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식당에서 일하는 수많은 아주머니들에 대해 생각했다. 사장님, 파트타임 알바, 직원, 상관없이 음식을 만들고, 나르고, 그릇을 씻고, 정리하고, 계산하시던 분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그들의 수고스러운 삶에 고개가 숙여졌다. 동시에 작은 다짐도 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꼭 감사 인사를 할것. 음식을 빨리 달라고 보채지 않을 것. 식사를 다 한 후엔 될 수 있다면 빨리 일어나 나올 것.
머리가 하얗게 센 엄마가 하루종일 불 앞에서 뚝배기를 끓이고 야채를 다듬고 장사 준비를 하는 것만 봐도 마음에 피로가 몰려온다. 두어 달 열심히 장사 준비를 하던 아버지도 가게를 연지 3일 만에 병원에서 링거 신세를 졌다.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걱정과 한숨에 턱턱 숨이 막혔다. 대체 어쩌자고 이걸 시작해서 이 고생을 하는지. 이미 시작한 것을 무를 수도 없고, 설이 지나면 일을 시작해야 하는 남편의 품도 더는 빌릴 수가 없는데..... 이번주면 끝나는 오전 돌봄 교실과 차량 운행이 되지 않는 학원 픽드랍, 아이들 밥이며 집안일은 또 어떻게 분배를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의 글쓰기. 이렇게 나의 글쓰기는 다시 또 뒷전으로 밀려나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사는 일 이라지만, 국밥집과 농장, 아이들 학원 스케줄에 따라 수 없이 길 위를 오가다 결국 지금 모습 그대로 마흔이 될까 싶어 마음에 슬금슬금 어둠이 밀려왔다. 살면서 수 없이 하게 되는 '작은 다짐'과 '시작'을 끌고 가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구나 싶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시작’만 있는 게 아니란 거.
장사를 시작한 부모님의 시작, 새 학년이 되는 아이들의 시작, 2023년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배우자의 시작. 그리고 언제 어떻게 갖게 될지 모를 그들의 수많은 시작들. 어쩌면 그 틈에서 조율하고 맞춰가며 지켜야 하는 것이 나의 ‘시작’ 일지 모르겠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지켜야 할 것들,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 끌어안고 가야 할 다양한 삶의 문제들이 있지만, 결국엔 그것들이 돌고돌아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 주고, 혼자 감당하지 못할 내 삶을 끌어안아 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의 작은 다짐과 시작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하루에 30분이라도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한 줄의 글이라도 쓰는 것. 어떤 마흔을 맞이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보다 나은 괜찮은 하루를 더 많이 만드는 것. 고된 노동으로 무거워진 몸과, 정신없이 돌아치는 일상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작은 다짐들을 실천하는 것. 그렇게 나를 확인할 수 있는 짧은 순간들을 될 수 있다면 놓치지 않고 하루를 마감 할 것. 스스로 자신을 일으키고 위로할 줄 아는 삶의 태도를 만들어 가는 것.
그런 의미로 ‘나의 시작’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작’에 함께 방점을 찍고 말해본다. 파.이.팅!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