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알이 탱글탱글 빛나는 밥그릇을 내 앞에 놓고, 자알 익은 총각김치를 물에 헹궈 잘라주며 아빠는 본격적인 레퍼토리를 시작했다.
레퍼토리는 이러하다.
1. (젓가락질을 하지 않는 손으로 내 발목을 주무르며) 밥알을 세며 먹냐
2. 그렇게 '쪼꼬매서' 언제 크냐
3. 나중에 커서(=어른이 돼서) 왜 이렇게 자기만 작냐고 아빠 원망하지 마라.
아빠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먹는 마아가린 밥은 고소하고 짭조름하다. 밥알에서 씹을수록 단 맛이 우러나오고 마아가린이 윤활유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목넘김이 좋다.
그렇게 잔소리 반, 꼬수운 밥 반이 내 뱃속을 통과해 나를 키웠다. 썩 눈에 띄게 크진 못했지만 가까스로 롤러코스터를 아무 제재 없이 탈 수 있을 만큼, 간신히 승용차 운전석에서 악셀에 발가락 끝이 닿을 만큼은 컸다.
그렇게 마음 꾹꾹 눌러 담은 마가린 밥을 억지로 먹여 가며 키운 딸이 저 멀리 태평양 건너의 섬에서 살겠다고 했을 때 아빠의 기분이 어땠을는지 나는 아직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가끔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는 아빠의 메시지는 나의 마음을 뜨거운 밥 위에 얹힌 마가린처럼 몽글몽글 녹여 버렸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빠의 진심에 나는 속절없이 울었다.
아빠는 지금도, 잦으면 1년에 한 번 보는 딸의 발목을 주무른다. 얼른 크라고.
낯선 땅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입맛이 없고, 세상 살아가기 유독 자신이 없는 외로운 오후면 나는 밥을 안친다.
고슬고슬한 밥 위에 마아가린 한 덩이, 간장 한 스푼, 참기름을 조금 부어 먹는데 그때 그맛이 아니다. 혹시나 하며 혼자 발목을 주물주물 하며 밥을 씹는다.
'쑥쑥 커야지, 쑥쑥 커서 씩씩하게 살아야지'다짐한다.
예전 같은 맛이 나지 않는 건 무엇이 빠져서일까
아아, 알 거 같기도 하다.
마아가린 숟가락으로 한 덩이, 간장 한 스푼, 참기름 약간, 사랑 담뿍, 잔소리 한 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