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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Sep 09. 2019

풍요가 낳은 건망증

백만 스물 한 번째 소비



난 학창 시절부터 우산을 자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기보단 잊어버렸다.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오다가, 버스에서 내리다가, 수업 끝나고서, 어디 모퉁이에 까맣게 잊힌 우산을 다 합하면 과장 좀 보태 부산 해수욕장에 꽂힌 파라솔 정도 될 테지. 엄마는 우산을 새로 사줄 때마다 또 잃어버리면 그냥 비 맞고 다니라며 으름장을 놨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나뿐 아니라 나의 오빠도 그랬고 주변 친구들도 그랬다. 하도 우산을 잃어버리니 더 이상 좋은 우산을 사지 않고 그때그때 삼천 원짜리 투명우산을 사서 쓰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덤벙거리는 내가 그 작은 섬에 살면서는 우산을 단 한 번도(다시 한번 강조한다. 단. 한. 번. 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고장 내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간 M사의 접이식 우산을 무려 5년 동안 잘 쓰고 있다.
왜?
비가 드물게 와서 잃어버릴 기회조차 적었을까?
늘 차를 타고 다녀서 우산이 필요 없었을까?
비 오는 날엔 집순이 모드로 방콕만 한걸까?
땡.
땡.
땡.
아주 땡땡땡이올시다.


이걸 설명할 이유는 하나뿐인 것 같다.
그곳은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우산'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곳이라는 걸 진즉에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비싼 가격을 주고도 괜찮은 우산'을 찾기가 어렵고, '삼천 원짜리 투명 우산'급의 우산도 기본적으로 만원, 이만 원 정도 한다. 말 그대로 우산이 귀해지자 나는 필사적으로 우산을 챙겼다.

비슷한 일례로 그곳에 사는 한 친구는 자기는 이 섬에 산 후로 휴대전화 스크린에 더 이상 금이 가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선 여섯일곱 번을 수리한 경력이 있다는 친구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쉽게 쉽게 스크린을 갈아줄 수리점이 한 군데도 없다 보니 휴대전화를 조심조심 갓난아기 다루듯 다룬 결과다.

한국에 온 지 일주일째.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사람들을 본다.
사업이 삐끗해 가세가 기울어가는 나의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다.
며칠 전에는 걷는 도중에 소나기가 와서 내 신발이 젖자 엄마는 근처에서 슬리퍼를 사자고 했다. 몇 년 전의 나도 신고 나온 구두가 불편하면 지하상가에 들어가 만원, 이만 원짜리 신발을 덥석 덥석 사곤 했지. 그 신발들은 다 어디 갔을까? 각자가 쌓아놓은 쓰레기산은 도대체 얼마나 높을까?

'사는게 힘들어 산다.' 인생을 사는게 힘들어 물건을 산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소비의 급류에서 남들처럼 신나게 서핑을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상대빈곤의 늪에 빠져 우울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결국 인생을 사는 것도 힘든데 물건을 사는 것도 힘들어진다.


이렇게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도 소비문화에 놀랍울 정도로 빨리 적응해나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 이 글은 바로 어제 우산을 고속버스에 놓고 내린 후 새로 우산을 사는 자의 참회록인 것이다.
풍요가 늘 좋기만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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