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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Nov 16. 2019

약자의 어필 법

엄마 그리고 나 


엄마는 오랫동안 앓고 있다. 엄마의 병은 아직까지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다. 뇌의 신경다발이 갑자기 붓는 병이라고 했던가. 당뇨처럼 평생 관리하고 주사를 맞아야 한다. 엄마가 이틀에 한 번씩 아빠에게 주사를 맞는 걸 보며 자랐다. 나중에는 주사 맞는 부위의 살이 온통 딱딱하게 굳고 예민해져 엄마는 주사를 맞을 때 소리를 질렀다. 가족 중 누군가가 오랜 기간 아프면 그 슬픔이나 연민은 옅어지기 마련이다. 나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진 엄마를 보면 엄마가 아픈 사람인지 종종 잊는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은행이었던가, 볼 일을 보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대기해야 하는 장소였다.  당시 컨디션이 정말 아슬아슬했던 엄마는 안내해주는 은행원에게 “제가 몸이 좀 아파서”라고 말한 덕에 긴 대기 시간을 압축했다. 그 후로 자주 엄마는 TV를 보고 집안일을 하다가도 친구나 친척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죽겠어. 매일 누워있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 보험을 들으라는 광고전화를 건 사람에게도 엄마는 “제가 좀 아파요”하고 말했다.  


지난주의 일이었다. 엄마와 같이 내 결혼식 때 입을 한복을 보러 갔다. 엄마는 한복집 주인과 옷을 갈아입으러 커튼 뒤로 들어갔다. 둘의 대화가 웅성웅성 들리다가 엄마의 ‘제가 좀 아파서’라는 말이 다시 콕 내 마음에 박혔다. 왜 자꾸 스스로 약자이고 싶어 할까. 왜 컨디션이 괜찮아 보이는 날도 친구의 전화에 ‘아프고 죽겠다’고 말하는 걸까. 왜 불필요한 순간에도 자신의 ‘아픔’을 어필할까. 모든 이로부터 동정과 배려를 받고 싶은 걸까. 나는 집에 오는 길에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하고 말았다. “엄마는 왜 자꾸 아프단 소리를 달고 살아? 그런 말 할 필요 없을 때에도 꼭 하더라.” 엄마는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 늘 그러하듯 별 대답이 없었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 자꾸 생각의 끝자락을 더듬더듬 붙잡고 침대에 누워 궁싯거리던 중 문득 엄마에게 나의 모습이 겹쳐 보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엄마의 그 행동이 내게 거슬렸음을 깨달았다. 타지에 살며 ‘이방인 임’을, ‘이 나라 말이 서투름’을 자꾸 덧붙이던 나. 그럴 필요가 없는 순간에도 굳이 나의 이질성을 까발려 선을 긋고자 했던 나. 어느 날 누군가에게 또다시 “제가 불어를 잘 못해서요.”라고 말하고 돌아서던 날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자꾸 스스로 불어 못한다고 말해?  너 불어 잘해. 완벽하진 않아도 할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거, 너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여러 모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 나는 나를 격려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이해했지만 묘한 서러움을 느꼈었다. 엄마도 내 질문에 그런 마음이었을까. 내가 자꾸 스스로 내 약점을 말하는 마음의 밑 구석에는 외로움과 불안함이 있었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은 것 같음에서 오는 외로움, 그리고 나의 모자람이 예고 없이 훅 드러났을 때 내가 느낄 수치심과 당혹감을 상상하며 오는 불안감. 그래서 나는 그냥 내 카드를 미리 모두 꺼내보인 셈이다. 


엄마도 그랬을까. 아픈 엄마에게 점점 무뎌져 가는 가족들의 등을 보며 혼자 울음을 늘켰을까.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고통을 흩뿌렸을까.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서라도 위로를 얻고 싶었을까. 혹은 누군가 병색을 알아채기 전에 괜히 슴슴한 척 약점을 털어놓은 걸까. 그도 아니면 엄마는 스스로의 푸석한 행색을 변명한 것일까. 그중 어떤 것이든 나는 이해해야만 한다.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또 다른 약자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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