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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Nov 16. 2019

웅크린 청춘

같은 시간, 다른 하루



일요일 오전 9시 도서관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일요일 오전 9시 나는 남편과 장을 보러 간다. 우리는 일요일 오전에만 여는 지역 재래시장을 애용하는데,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비닐봉지를 쓰지 않기 위해 각종 면보와 큰 가방, 밀폐용기를 챙겨 나간다. 무얼 살지 적은 목록도 필수. 하지만 그 일요일의 습관도 잠시 유예될 상황이었다. 나는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을 보고, 라섹 수술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한국에 왔다. 라섹 수술과 결혼식에 앞서 자격증 시험이 있었고, 이런저런 핑계로 공부를 미뤄오던 나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석하는 중이었다. 


내가 열람실로 들어서자 볼록볼록 솟아오른 머리들이 보인다. 주말도 예외 없이 일찍부터 나온 이들. 누군가는 법률 용어가 가득 적힌 책에, 누군가는 커다란 계산기에, 누군가는 영어 단어장에 고개를 박고 자신들의 일요일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아마 이 중 상당수는 도서관이 닫는 시간까지 버티고 갈 테지. 순간 이 장면에 스스럼없이 동화되는 나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무언가를 ‘열심히 했다’라고 느껴본 적이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무언가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오히려 모자라게 느껴진 적이 언제더라. 


도서관엔 젊은 사람들만 오지 않았다. 특히 평일에는 퇴근 시간 무렵 장년의 직장인들이 우르르 들어와 인생의 다음 챕터를 준비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이유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를 책상 앞에 앉히는 그 열정만으로 모두가 청춘이었다. 웅크린 청춘들이었다. 정말 작아서 작은 게 아니라 움트기 위해 웅크려 있느라 작아 보이는 청춘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농담처럼 그들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 웅크려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의 둥그런 등에서 당장이라도 날개가 솟아 나올 것처럼 그들을 훔쳐보기도 했다.   


나의 도서관 출입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예정된 날짜에 시험을 봤고, 눈 수술을 했고,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을 맞이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을 여행했다. 그렇게 두 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고백하건대 컴퓨터 화면에 ‘합격’이라는 두 자를 보기 전까진 도서관의 ‘도’ 자도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필기시험을 덜컥 합격하고 나자, 면접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음 날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침 9시였다. 


열람실에 들어서자 낯익은 등과 머리가 눈에 보인다. 그들은 내가 병원에서 안대를 붙이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에도, 한복을 고르고, 맥주를 마시고, 창덕궁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이태원 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매일 아침 9시 그 자리에 앉았으리라. 잠이 쏟아지는 오후 2시 열람실 밖에서 기지개를 켜고 발가락을 움직여 보았으리라.  


참으로 청춘들이었다. 그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 즉 열정에 비례했다. 내가 나의 시간을 사는 동안 그들의 하루는 매일 똑같이 흘러갔지만, 결국엔 같지 않은 하루들이었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하루들이었다. 


면접을 보기 전 날, 나는 아마도 다시 올 일이 없을 열람실을 떠나며 그들의 등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나는 한동안 매주 일요일 아침 장 볼 목록을 써내려 갈 때, 면보와 장바구니를 챙길 때 그들의 등을 생각하겠지. 그리고 존경을 담아 그들의 고요한 열정을 예찬하며 한 주를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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