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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Nov 16. 2019

너도 너 같은 딸년 낳아봐라.

라는 그럴싸하고도 희한한 저주


연예인들의 귀여운 자녀들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설탕에 녹은 딸기 같은 표정을 짓는 엄마에게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가 울었다. 내가 아이 낳지 않는 게 엄마는 왜 슬플까? 물론 아직 경험이 없으니 생명을 낳아 기른다는 감정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주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람들 모두가 입을 모아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고 했으니 그 사랑의 깊이는 대단할 거라 생각한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지만 내 나름대로 아이를 낳는 것을 거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일단 내가 아이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키울 수 있을 만큼 성숙하고 현명한 인격체인가가 첫 번째 질문이다. 나는 분명 내 희생을 볼모 삼아 아이에게 내 의견을 종용할 것이다. 내가 먼저 살아오며 체화한 습관들과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아이에게 주입할 것이다. 


두 번째는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고난과 고통(아이의 장애, 비행, 경제적 어려움 등)을 비참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일 것 같다. 난 뜬구름 잡는 파워 옵티미스트는 절대 아니거니와, 사는 동안 맞닥 뜨리는 고난을 극복하고 그 경험을 고찰하며 해탈한 성자도 못되므로. 


세 번째는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기 미안하다.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 경제 위기, 폭력적인 사회, 식량 위기, 테러리즘. 평범하게 살기 위해 죽을 듯 사력을 다해야 하는 이 세상에 새 생명을 내놓기 꺼려진다.  소소하게 마주하는 인간적인 행복들로 위로받기엔 실로 미친 세상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인간 하나를 더 생산하는 게 지구에게도 미안하다. 인간만큼 다른 생명과 자연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으스대는 존재가 있을까. 우리 인간은 동물의 살코기를 먹기 위해 몇 백억의 생명을 좁디좁은 우리 안에 가두고 강간하고 학살한다.  


네 번째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큰 과정을 통해 겪을 내 심신의 타격과 사회적 고립, 기회의 박탈이 억울하다. 내가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라거나, 내 몸이 출산만 아니면 절대 건강할 것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보통의 사람이라면 예견된 골칫덩어리는 피해 가고 싶지 않나.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하는 내게 엄마는 넌 늘 이기적이라고 했다. 이기적이니까 제멋대로 외국에 나가 살고 먼 곳에 살며 전화 한 통 안 한다고 했다. 너도 너 같은 딸 낳아보라는 뜻 모를 저주 같은 것도 덧붙이며.  


비행이라면 20살 때 한 번 해본 외박이 전부인 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에게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느냐 묻자, 엄마는 뜬금없게도 얼마 전 엄마가 계단에 굴러 다쳤을 때 내가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두 달 전쯤 엄마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전화를 끊고 덤덤했다. 엄마는 무덤덤한 나의 태도가 분했는지, 눈에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진 사진도 보내왔다. 그때에도 나는 그럭저럭 묵묵한 편이었는데, 며칠 후 버스를 타서 엄마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가 껌을 소리 내서 씹을 때 갑자기 울음이 터졌었다. 나는 버스에서 사연 있는 사람처럼 한참을 울었다. 하지만 그 이야길 엄마에게 하진 않았으니, 엄마 입장에서 나는 매정한 딸년이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조금 황망해져서 눈물이 나왔다. 무슨 말을 덧붙여도 변명일 거 같아 조용히 울었다. 


우린 따로 소파 끝에 앉아 한참을 울다가 끌어안고 또 울었다. 엄마는 나를 안고 집 형편 때문에 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해 사과를 늘어놓았다. 나는 엄마의 사과가 지금 내 감정과 너무 동떨어져서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엄마를 모르는 만큼, 엄마도 나를 참 모르는구나.  


 아니, 알더라도 부모 맘은 그런 거구나. 거봐 엄마, 그냥 애 안 갖는 게 속 편하겠다, 그치.  


엄마 미안, 너 같은 딸년 낳아서 키워보라던 엄마의 저주인지 복수인지 모를 것을 너무 손쉽게 패스해버려서, 정말 미안. 


엄마는 나의 말이 이해되지 않겠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 못한 채 사랑하며 긴 시간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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