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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Nov 16. 2019

수제화

원하는걸 귀 기울여 들어드립니다.



 나의 엄마 아빠는 남편에게 무얼 더 못해줘서 안달 난 사람들처럼 굴었다. 셔츠에 바지까지 맞춰주고도 모자라 정장 재킷까지 맞춰주려는 걸 말리고 말렸다. 아빠는 우리가 필요 없다며 사양하자 사위에게 이 정도도 못해주냐며 서운함을 표했고, 나는 그의 비합리적인 시혜가 답답했다. 


“아빠. 주고 싶으면 돈으로 줘. 그럼 쓸모라도 있지. 그 더운 나라에서 정장 재킷을 누가 입는다 그래.”하는 야멸찬 핀잔을 듣고서야 그는 고집을 멈췄다. 하지만 어디에 살든 편하고 고급스러운 신발 한 켤레쯤은 있어야 한다는 고집은 끝끝내 내려놓지 않았다. 


하여 우리는 차를 몰고 수제화 가게에 갔다. 그 집의 간판은 너무 낡고 촌스러워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농으로 ‘구한말로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외치는 나에게 엄마는 사뭇 진지하고 단정적인 목소리로 “여기 신발 잘해.”하더니 성큼성큼 들어갔다. 6평 남짓한 가게 안은 혼란스러웠다. 그 작고 낡은 가게에 이미 세네 명의 손님이 서성이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고도 어수선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일터와 가정의 모호한 경계선이었다. 가게 안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구두를 만드는 곳이었다. 구두약의 매캐하고 중독적인 향이 진동을 했고 사방의 벽에 고정된 선반에는 신발 샘플들이 빈틈없이 빼곡했다. 테이블에도 각종 날카롭거나 뭉툭한 도구와 가위가 어지러이 놓여있었는데, 그 테이블 곁에 두 명이 꼬마들이 앉아있었다. 꼬마들은 캐러멜 껍질을 벗겨 날름날름 집어 먹고는 검은 기름때가 낀 테이블 위에 장난감 자동차와 로보트를 열을 맞춰 세웠다.  


“피슝 피슝!” 


차와 로보트 간에 벌어지는 전쟁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낮은 선반 뒤쪽에 앉아있는 나이 든 남자였다. 그의 손은 새까맸고, 얼룩덜룩한 천들이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이마에는 현미경인지 작은 플래시인지 모를 것을 쓰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모든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일반인은 쓰임을 알기 힘든 기계 옆에 앉은 그는 갈색 가죽 구두를 들고 헤-하는 표정으로 꼬마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꼬마들은 그의 손주인 듯했다.  


가게 안에는 꼬마들과 나이 든 남자, 손님 말고도 사람이 더 있었다. 꼬마들의 엄마로 보이는 앳된 여자, 그리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또 다른 중년 남자. 여자는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매고 왔을 가방을 어깨에 걸고 꼬마에게 밖에 나가자고  제안했다. 딸기맛 음료수를 사준다는 엄마의 말에 아이들은 비눗방울이 터지듯 까르르 웃으며 앞서 뛰쳐나갔다.  


손님을 맞이하는 남자는 우리에게 다가와 누가 신을 신발인지 물었다. 나는 남편을 가리켰다. 남자는 남편의 발 밑에 A4용지를 덧대더니 발 모양을 볼펜으로 그리고서 생각해놓은 디자인이 있냐고 물었다. 한국말이 서툰 남편은 나름 구체적으로 원하는 디자인이 있는지 영어로 열심히 설명했고 나는 그에게 남편이 요구한 사항을 고스란히 통역을 해주었다. 옅은 갈색일 것, 굽은 3cm 이상은 안되며 발등엔 구두끈이나 요란한 장식 대신 드라이빙 슈즈처럼 편안하게 발을 감쌀 것, 새끼발가락 쪽 공간이 넉넉할 것. 내가 끊임없이 통역을 하는 동안 그는 일전에 발의 모양을 그린 A4용지에 대충 무언가를 휘갈겼다. “갈색, 심플, 발등” 같은 단어였는데 이틀만 지나고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가늠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저런 얼렁뚱땅한 디자인이 말이나 되는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선반 뒤에 앉은 중년 남자는 이미 다른 이의 신발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신뢰가 점점 떨어진 나는 가게를 나설 무렵엔 신이 난 남편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또한 남자가 A4용지에 무얼 그리고 얼마나 대충 휘갈기는지 본 지라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2주가 지나고 우린 신발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옅은 갈색에 깔끔한 윗면, 3cm의 굽의 신발을 한 짝 씩 손에 들고 쳐다보는 우리에게 선반 뒤의 남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새끼발가락 쪽은 일부로 꽉 끼게 했어요. 가죽은 신다 보면 금세 늘어나서 처음에 약간 불편한 게 오히려 낫다니까요.” 


나는 문득 그를 의심한 것이 무안해졌다. 무심하다고 생각했던 그 그림은 자신들이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었고, 멍한 표정으로 다른 신발을 다듬던 장인의 귀는 열려 있었다.  


가게를 나오는 길 남편이 말했다. 


“우리가 착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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