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니 Nov 16. 2019

지워지는 목소리

BGM의 비애



비바람이 몰아치는 오후였다. 우산을 쓴 것이 무색하게 옷이 젖어 허무해졌다. 바지단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무렵엔 그냥 우산을 접어버릴까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그를 봤다. 그는 짧은 치마에 무릎까지 오는 긴 양말을 신고 비바람 속에 서 있었다. 화장품 가게 앞 쪽의 길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연신 빈 바구니를 내밀며, 마이크에 대고 끊임없이 말을 했다.  


"오늘 50% 행사 진행하고 있고요. 이만 원 이상 구매 시 마스크팩 증정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내미는 바구니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그의 밝게 꾸며낸 목소리도 옆 가게가 틀어놓은 커다란 노랫소리와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속절없이 묻힐 뿐이다.  


나는 마이크를 대고도 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괜히 신경 쓰여 발걸음을 멈췄다. 비에 잔뜩 젖은 그를 보다 갑자기 엉뚱한 상상에 빠진다. 그가 마이크에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저는 오늘 아침에 북엇국을 먹었고 이따가 집에 가서 택배 뜯을 생각에 아주 신이 난답니다.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을 모카예요!" 같은 말. 어차피 아무도 안 들어주는데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선인장 덕후라서 집에 선인장 화분이 37개나 있다고요"라고 그가 외친다면 사람들은 걸음을 멈춰 서서 들어줄까나. 


한 개인의 고함이, 울부짖음이, 애절함이 배경음이 되는 사회의 온도는 몇 도일까. 목소리가 지워지는 수많은 개인들이 떠오른다. 


건물 꼭대기에서 농성을 하며 마이크에 대고 울부짖는 철거민이, 한겨울 연탄 장 수를 세고 있는 독거노인이, 어른들의 이기심에 희생되는 청년 노동자가, 도살장으로 실려가는 슬픈 가축의 눈이 떠오른다. 


자꾸 귀 기울이며 살고 싶다. 지워져도 되는 목소리는 없으므로. 



작가의 이전글 과일 장수 아저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