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거지의 핑계
오늘도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준 뒤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나른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꼬리를 잇고 흔적을 남길 땐 글감이 떨어진다. 아마 ‘연말’이라는 세기말적 감각도 한 몫하겠지. 글이 다 무슨 소용이랴 싶어 첫 문단만 시작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의 업과 유흥에 밀려 쌓여만 간 글이 네댓 개다. 말 그대로 될 대로 돼라, 식이다.
그래도 오늘처럼 잠포록한 날엔 뭐라도 쓰고 싶어 커피를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미뤄둔 글 하나를 끄집어 내 써둔 문장을 읽어보고 다음 문장을 쥐어 짜내 본다. 나오지 않는다. 변비에 걸린 기분이다. 수많은 유명하고 유능한 작가들은 글 쓰는 것을 업무처럼 대하라고 하던데, 이런 정도로는 업무평가에서 최하의 평가를 받는 거 아닐까. 물론 여기서 평가의 주체는 읽는 사람일 테고. 나는 꾸벅꾸벅 조는 고양이를 보다가 노트북을 덮고 그 녀석의 미간을 쓰다듬는다.
이럴 때면 14 년 전 점을 보러 간 할머니에게 점쟁이가 나에 대해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 집 손녀는 용두사미의 삶을 살 거야, 뒷심이 영 딸려. 콧웃음을 치고 넘겼던 이 맹물 같은 저주는 매 순간 내가 나의 강단을 의심할 때마다 회상되었다.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대학교를 별 볼 일 없는 성적으로 졸업했을 때, 옷과 소품을 리폼해보는 걸 소망하며 사들인 프랑스 자수 실에 먼지가 소복이 쌓인 걸 볼 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감이 좋고 손재주가 있다는 주변의 칭찬에 웹툰을 취미로 그리겠다며 산 태블릿이 애물단지처럼 책장에서 선반으로 이리저리 옮겨질 때, 몇 년 전 배우기 시작한 불어를 여전히 우물쭈물 말할 때 그리고 지금.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욕망이 타오르기도 전에 손끝이 미지근할 때.
점쟁이의 말이나 타로카드 혹은 혈액형별 성격 따위를 보며 정말 자신과 일치한다고 믿는 것을 바넘효과라고 한다. 바넘효과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을 마치 그것이 자기만의 특별한 성격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사람들을 마음 깊이 챙기지만, 상처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같은 것.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내 편이라 믿는 사람을 아끼지만 인간관계의 상처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 않나. 따라서 점쟁이의 시시한 예언을 적시에 맞춰 떠올리는 것 또한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경우가 끈기를 갖고 계속 해나가는 것이 어렵고 특별한 일이지, 열정을 잃는 것은 새로울 것 없이 매일 반복되는 모두의 이야기이다. 나도 그저 수만의 포기자에 계속 소속될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할 수 없는 것은 열정이다. 열정이란 건 어찌 된 일인지 속이려 해도 속여지지 않고 어김없이 내면의 민낯을 들이민다. 너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너의 등을 떠밀어줄 욕심이 충분치 않다고, 열정을 흉내 내는 풋내기일 뿐이라고. 글쓰기에 쏟는 나의 열정이 부족하다. 단순히 그것뿐이다.
핑계를 대보자면, 몸 하나로 여럿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비유법처럼. 휘영청 뜬 달이 어떤 글에선 소망이 되기도, 사랑이 되기도, 그러다 그리움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 희한한 욕망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중되어도 부족한 열정을 조각조각 내어 여기저기 흩뿌렸다. 어느 날은 그림을 그렸다가 어느 날은 글을 쓰고 어느 날은 상인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교사가 됐다. 그러다 어느 날은 싫증을 내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전문성 없이 유랑할 바에 하나를 택하는 건 어떠냐 충고했지만, 나는 속으로 아무렴 어떻냐고 생각했다. 독기가 없는 삶도 있는 것이다. 그저 얇더라도 색이 고운 결이 층층이 켜인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가 아닌 여럿의 삶을 살기 위해 아직 소진되지 않은 열정을 쥐어짜 내면 되니까, 지금 이 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