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은 여전히 기숙사
5년 간의 사감보 기숙사 생활
6번의 이사
1년의 한번 꼴 역마살로 인한 이동이었다.
짧은(?) 사감보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어학연수를 핑계 삼은 도피 연수 생활의 시작이었다.
역마살은 나를 중국 난징의 대학교 국제기숙사로 이동시켰다.
나의 룸메이트는 인도네시아와 중국의 혼혈인 여학생이었다.
무슬림으로 하루에 5번 기도를 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의 기도하는 뒷태를 보고 있노라면 절에서 하던 108배가 떠올랐다.
그녀의 배려로 1주일 후 그녀가 방을 옮겼다.
나의 역마살이 그녀에게로 옮겨진듯 하다.
그로 인해 나는 4개월동안 한방에서 지낼 수 있었다.
다만, 변화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였다.
3인실을 1인실로 넓은 공간을 사용하는 나는 한달에 한번씩 3개의 침대를
이리저리 요리저리 옮기면서 혼자만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 집은 운동을 할 수 있는 짐gym이자,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관이자.
조리실에서 간단한 요리를 한 후 혼밥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이전부터 혼밥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4개월동안 오로지 나만의 공간이었던 집이었다.
한달 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 후 나는 다시 역마살로 인해 떠나게 되었다.
다시 한국,
10박11일 동안 진정한 역마살을 즐기기 위해 돌아왔다.
재미교포 청소년 100명과 함께 떠난 한국문화탐방 체험이다.
인천공항을 찍는 동시에 서울로 서울에서 세종시로 세종시에 경주
경주에서 포항 포항에서 다시 세종시 세종시에서 임진강 도라산역
군대입소 용인민속촌 수원 수원에서 천안 천안에서 다시 세종시 그리고 서울
마지막으로 친숙한 인천공항
10박 11일 동안 숨막히는 여름을 뚫고 숨막히는 역마살의 기행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나에게 집은 잠시 머무르는 곳이며, 일을 위한 연장선이었다.
모든 여정을 마친 후 중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집이 없었다.
떠나기 전 1달동안 부모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역마살의 피곤을 풀기 위해 빈둥빈둥 방바닥을 놀이터 삼아 즐기며
나의 역마살을 쉬게 하였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녀석이기에 잠시 조용히 팽개쳐 두었다.
그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허무한 노력이기도 했다.
한달 뒤 나는 중국행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잠시의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정확히 4개월 후 나는 우즈베키스탄 행 비행기에 실려 날아가고 있었다.
일하면서 쉴 수 있는 집을 찾아서 다시 역마살이 일하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