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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Aug 29. 2021

그녀에게 창업은 필연이었다

소셜벤처를 창업한 아내에게 변호사 남편이 내조하는 방법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지만 시작은 정말 우연이었다. 아니, 당시에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분명 필연이었지만, 돌이켜보니 기억의 처음과 끝만 남아 마치 우연처럼 추억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려나.




여느 신혼부부들처럼 우리도 결혼 초기에는 열심히 맞벌이를 하며 살았다. 맞벌이 부부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두 명이 모두 출근하는 피로한 아침 풍경에서는 향긋한 커피와 고소한 토스트가 수놓진 아침식사가 들어갈만한 여백이 별로 없다. 그러나 잠을 줄여서라도 아침을 먹는 남편의 유별난 생활습관 때문에 아내도 10년 동안 챙겨 먹지 않던 아침을 먹게 되었다. 준비는 내가 하기는 하지만, 의리 때문에 매번 졸린 눈을 비비며 식사를 하는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워 같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대용식을 논의하던 중, 아내외가 쪽 양계장에서 만드시는 '구운 계란'을 주문해보자고 제안하였다.


전에도 편의점에서 '감동란' 같은 가공된 계란을 몇 번 사 먹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가공된 계란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첫맛은 제품명 그대로 감동이었지만, 과다한 가미(加味)로 인해 먹다 보니 금방 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맥반석 가마에서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으로 촉촉하게 구워진 계란은 그야말로 '손이 가요 손이 가~'라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굽는 과정에서 아무런 화학물질을 첨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의점 판매 계란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에 좋다는 점도 과식에 대한 죄책감을 크게 줄여주었다. 물론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것은 아니더라.




아내는 예전부터 취미생활로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해왔다. 온라인 마케팅 담당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SNS가 친숙하였을 것이다. 블로그에는 코스메틱 업종에서 일했던 만큼 주로 뷰티에 관한 자료, 그리고 맛집에 관한 포스팅이 주였다. 아내는 구운 계란을 맛있게 먹은 다음, 외가 쪽 양계장을 홍보도 해줄 겸 구운 계란에 대한 후기를 블로그에 올리고 포스팅 링크를 공유하며 주변에 입소문을 내드렸다. 포스팅을 잘해서인지, 아내의 선한 에너지가 전달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인들로부터 꽤나 많은 주문이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내는 주문내역을 엑셀 파일로 꼼꼼히 정리하여 양계장 삼촌께 전달해드렸다. 참고로 양계장 대표님과 아내의 실제 촌수는 삼촌보다는 훨씬 멀지만, 삼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촌수가 뭣이 중한가, 마음의 거리가 중허지.


양계장 삼촌께서는 아내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시며 무려 8판(!)의 계란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계란의 소비기한은 길면 2달, 권장은 1달 정도다. 2인 가구가 8판(240알)의 계란을 1달 동안 먹으려면 쉬지 않고 하루에 8개의 계란을 소비해야 한다. 힘들게 보내주신 계란을 결코 버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온갖 계란 요리 레시피를 동원하여 결국 30일의 계란 소비 대장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 정도 먹으면 질릴 법도 한데, 지금까지도 계란을 맛있게 잘 먹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맛도 있고, 조리도 간편하고, 영양도 좋은 계란. 여전히 나는 김치보다 계란이 밥상에서 더 소중하다.




이렇게나 큰 선물을 받았기에 충남 홍성에 내려갈 일이 생겼을 때 감사인사를 드리고자 아내를 따라 양계장을 찾아뵈었다. 아직은 코로나가 활개 치기 전의 세상이었던지라, 삼촌과 숙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며 식구들 근황이나 양계장에 얽힌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홍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주말마다 외가댁의 양계장에서 계란을 꺼내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만 해도 동물복지라는 개념은 생소했고, 대부분의 양계장은 여러 층으로 된 케이지에서 닭을 사육하였다. 키가 큰 어른들은 아래층에 있는 케이지에서 허리를 굽혀 달걀을 꺼내기 매우 힘들었기에, 아래층 케이지에서의 달걀 수거는 아내를 포함한 사촌동생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케이지 사육장의 모습은 그다지 평화롭지 않다. 케이지 사육장의 닭 1마리는 A4용지보다 작은 면적의 케이지에서 평생을 생활하며, 효율적인 달걀 생산을 위해 케이지는 빼곡하게 밀집하여 설치되어 있다. 그러한 사육환경에서 성장하는 닭들이 스트레스를 안 받을 리 없다. 심지가 굳지 못한 일부 닭들은 탄생을 후회하며 케이지 양계장이 지옥 같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육환경은  지금에 와서도 대부분의 양계장에서 크게 바뀌지는 못하였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환경에서 달걀을 수거하는 것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다행히 대화는 유쾌하였고, 환대는 따스하였다. 오랜 세월은 기억의 모난 부분을 풍화시키며 좀 더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대화 도중에 우리가 온라인으로 구운 계란을 주문했 이야기를 하며 계란의 온라인 판매현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양계농가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다들 너무 바쁘시기 때문에 온라인 쪽은 잘 신경 쓰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아내가 갑자기 말했다.


오빠, 나 온라인으로 계란 팔아볼까?



그것이 창업을 향한 아내의 첫걸음이었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 서툴렀던 시작을 반추해보며, 우리가 우연이라고 느끼는 대부분의 사건은 인과에 대한 인지의 부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의 현재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지 사건과 경험은 모두 우리가 과거 어디쯤에서인가 내렸던 결정, 고민했던 선택이 켜켜이 쌓여 모인 거대한 필연이다. 지금에 이르러 예전의 고민과 결정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눈앞에 닥친 일들이 우연이라고 속편하게 판단해버리곤 한다.


창업이라는 선택지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어렸을 때 양계장에서 계란을 꺼내던 경험에서, 서울에 상경하여 온라인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네이버 블로그를 하고, 나눔을 좋아하는 성격까지, 하나하나 필연의 구슬이 꿰어져 창업이라는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아내의 창업은 회사로부터의 도피행 끝에 얻어걸린 기연이 아닌, 성실히 살아온 과거로부터 일궈낸 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 또한 앞으로 더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기 위해, 앞으로 과거가 될 현재에 조금 더 집중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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