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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 Nov 17. 2022

『독일인의 사랑』- 사랑의 부조리함과 아름다움

해외 문학 읽기


읽으면서

※ 스포일러 주의!


        장 그르니에는 글쓰기를 자신의 강박 관념을 정리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숱한 사랑 이야기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에 좌절하고 구원받았던 것일까? 사랑 이야기는 이제 질색이라 해도 할 말 없지만, 그 중 아름다운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독일인의 사랑」을 꼽으리라.

           

      소설에서 소설은 사랑 자체에 대한 부조리를 다룬다. 소설의 전체를 아우르는 테마인 사랑의 부조리함은 화자의 대사로 직접 드러난다.


한 번 사랑하고 나서 영원히 고독해져야 한단 말인가! 한 번 믿고 나서 영원히 눈이 멀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엄연한 고문이다. 인간이 행하는 여타 모든 고문도 이 고문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니라.  


        화자는 일시성 앞에서 소모적인 일로 전락하는 사랑에 비탄한다. 소설은 서사 전체에 걸쳐 화자와 마리아의 관계가 변화함을 보여주고 이러한 부조리함을 다양하고 복합적인 형태로 드러내고 있다. 화자와 마리아가 놓인 신분과 환경의 차이, 거절에 대한 두려움, 마리아의 심장병과 죽음 등 이 모든 사회적•종교적•정신적•육체적 장애물은 결말을 제외한 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마리아의 심장병과 죽음은 부조리함을 극단적으로 대표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확정된 죽음 앞에서 그들이 나누는 사랑이란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독일인의 사랑」이 묻는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하는가?'로  귀결한다. 이는 소설의 후반부 화자가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아의 대사로 직접 전해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즉, 마리아의 질문 이전에 이어지 서사는 모두 '왜 사랑하는가?'에 답하기 위한 장대한 서스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 마리아와 화자의 문답으로 이 모든 문제를 직접 드러내고 해소하는 방식이다.


        이야기가 현대에서 각별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소설은 산업화의 중심에서 쓰여졌고 이는 현대의 상황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현대의 사랑과 인간 관계는 여타 물질과 다르지 않게 타산의 저울 위에 올려진다. 사랑또한 모든 게 빠르고 간편해진 현대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독일인의 사랑」이 말하는 '영원하고 고결한' 사랑의 형태는 이러한 현실과 괴리를 형성한다. 소설 속 두 인물의 사랑은 환상이나 동화에 가깝게 그려진다. 화자의 행동은 마치 이성과 합리의 토대에서 아득히 벗어난 충동의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난데없이 시대의 반의지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니「독일인의 사랑」이 허무맹랑하고 유치한 책이란 평가가 과장되거나 가혹한 처사는 아닐 것이다.


        「독일인의 사랑」은 1인칭 주인공을 통해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인물상과 관계를 제시한다. 작가는 화자의 시점에서 마리아를 향한 사랑에 대한 본능적인 확신을 보여준다. 그 중 마리아의 죽음을 앞두고 화자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두 인물 간의 사랑이 죽음으로 주어지는 태초의 허무함과 부조리를 극복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즉, 작가는 사랑을 통해 삶의 보편성을 회복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기대를 내비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인의 사랑」은 시대착오적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보편성과 인간성을 회복하는 고전으로 읽혀야 한다.


...

       내게「독일인의 사랑」을 읽는 시간은 가슴이 충만해지는 순간들이었다. 두 인물이 겪는 좌절과 기쁨은 잊혀진 기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없는 환희의 순간이 있다. 그 충만함을 공식과 논리로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어야 하는지! 그 찰나의 신비를 담기에 글은 너무나 보잘것없다.




1. 화자가 마리아가 반지를 되돌려 줄 때 느낀 '솟구치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사랑의 중추에 관해 아이의 순수함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이때 아이의 사랑은 '포괄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    어린이의 내부에서 눈뜨는 동경 - 이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심오한 사랑이다. 그것은 온 세계를 포괄하는 사랑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타인'에 대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의 사랑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대체 낯선 타인이라는 게 뭔데요? 그럼,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    … 나는 곧잘 생각에 잠겨 앞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여자도 낯선 타인에 속할까?'하고 자문해보곤 했다. 그럴 때 그녀는 종종 내 머리에 손을 얹곤 했다. 그러면 마치 무엇인가 내 온몸을 통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는 도망칠 수도 뭐라고 입을 뗄 수도 없이 꼼짝없이 사로잡혀 그녀의 그윽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후작 부인을 허락 없이 안았다는 이유로 꾸중할 때, 그는 난생 처음 거절을 경험한다. 마리아 역시 진심을 줄 수 없는 상대인지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거부와 좌절은 아이의 순수함을 상실케 한다. 다음 문장은 이러한 거절과 고통으로 화자가 순수함을 잃고 어린이와 작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낯선 타인'의 존재를 배우면서부터 어린이는 이미 어린이임을 고별한다. … 왜냐하면 인사에 응답이 없는 경우 얼마나 에는 듯 가슴에 상처를 입는가를, 또 우리가 일단 인사를 나누고 악수했던 이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아이가 가르침받은 타자와의 경계는 곧 사랑이란 감정이 띠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관계의 일시성을 비추며 하나의 모순점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화자가 그녀의 반지를 갖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데 있다. 마리아의 반지는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나누어준 유산의 일부로, 마리아의 죽음을 암시하는 상징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자가 마리아에게 받은 반지를 되돌려주며 "이 반지를 내게 선사하고 싶으면 그냥 네가 갖고 있어. 너의 것은 곧 내 것이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마리아의 죽음으로 겪게 될 고통을 인지하면서도 타자성을 극복하는 화자의 포괄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일관되게 서술되는 '솟구치는 하나의 감정'은 사랑 자체에 아이의 원초적인 순수함이 내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후작 부인을 껴안았을 때, 마리아에게 반지를 되돌려 주기 전에 '솟구치는 하나의 감정'에 압도된다.




-
        #2 화자와 마리아의 종교 논박 장면은 무엇을 의미할까?



        화자는 자라 청년이 되고, 다양한 지식을 얻었으며 많은 대가를 치렀다. 그도 어른들이 대개 그러는 것처럼 어린 시절 아련한 향수에 빠지곤 했다. 과거의 모습 대부분은 세월에 덮였지만, 그의 가슴 속엔 영원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과 마리아의 형상이었다. 그는 불변하는 신이 자신 속에 있음을 믿었고, 어린 시절의 마리아가 마치 고향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내밀히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리아는 그의 자아 일부분으로 화(化)해 있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났다. 여느 때와 같이 추억에 잠겨있는 그때,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마리아는 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는 꿈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마리아와 해후한다. 마리아는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투명하고 신선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병세는 호전이 없는 듯했으므로 밤이 깊어지면 그는 마리아를 뒤로 하고 떠나야 했다. 그렇게 다음 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만나고 또 기약하고 … 그녀는 매일 밤 그와 비밀이 없는 얘기를 했고 둘 사이는 하루가 다르게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와 청년은 그들이 믿는 신앙에 관해 얘기하게 된다. 이야기는 마리아가 청년에게 하나의 기독교 교리에 관해 입을 떼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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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는 마리아와의 논박을 통해 또 하나의 벽에 부딪힌다. 그것은 사랑이 가지는 비합일성이다. 이 장황한 논박의 핵심은 기독교적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대비에서 드러난다. 마리아는 기독교적 사랑으로 자신의 질병과 고통을 극복하고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독일 신학>이란 제목의 책이 말하는 계시다.  더 나아가 마리아는 '하느님 빛' 안에서 끝없는 겸허함, 성실함, 평등과 진실, 평화로움 등의 덕성과 합일을 얻었음을 얘기한다. 이 대목에서는 기독교적 사랑이 그녀의 삶에 신적 가치인 영원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진리가 계시로 나타나는 것이지 계시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진리는 내 안에 있었습니다."


|    "… 하느님 빛으로부터 나와 그 빛 안에서 합일이 이루어지는 곳에선 정신적 교만이나 경솔한 방종, 분방한 기질을 볼 수 없으며, 그곳엔 오로지 끝없는 겸허함, 무한히 자신을 움츠린 우려의 마음, 단정함과 성실, 평등과 진실, 평화로움과 만족스러움 요컨대 덕성에 속한 일체의 것이 자리하게 되느니라.…"



        화자가 사랑 고백을 망설이는 이유는 인간의 사랑이 신적인 합일성과 영원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은 신적 사랑과 달리 진리 그 자체를 반영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제한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신의 진리에 비해 진실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마리아의 대사에서 알 수 있다.



|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걸 깨닫기란 무척이나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의 표현은 언제든 쉽게 꾸며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술'이 신적 사랑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쓰인다는 것이다. 「독일인의 사랑」 속엔 다양한 예술 작품이 등장한다. 마리아의 초상화와 신학책, 청년이 마리아에게 마음을 고백할 때 건넨 시집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리아는 위에서 시가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 형식에 담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    "… 참된 시인이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 운율이라는 구속된 형식에 담아 표현할 줄 알듯이, 인간이라면 사회의 속박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감정의 자유를 지킬 줄 알아야겠지요."



        화자가 고민 끝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를 그녀에게 건네 그의 마음을 짐작게 한 장면에서도 예술의 이러한 효용을 볼 수 있다. 즉, 화자가 '시'를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은 기독교적 사랑에 비해 인간의 사랑이 띠는 일시성을 극복하려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청년과 마리아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이 이야기는, 연인 간의 사랑이 일시성을 초월해 영원이라는 기독교적 가치를 회복하는 종교적, 예술적 메타포인 것이다.



|    "… 너의 맑은 눈을 내게 다오. 너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읽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아, 사랑조차 이토록 약한 것일까? 마음을 열어 그것을 말하게 할 힘이 없는가?…" - 청년이 건넨 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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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랑을 고백받은 마리아는 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을까?


        사랑을 전한 다음 날 아침, 마리아의 고문관인 늙은 의사가 그의 집을 찾는다. 마리아의 병세가 더욱 나빠져 당장 시골로 가야 한다는 전보였다. 청년에겐 고향을 잠시 떠나있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어두고선 다시 한번 고향을 떠난다.



        그는 자연에 칩거하며 나날을 괴로움에 빠졌다. 그는 마리아의 어떤 한 줄의 소식, 생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하지만 청년은 아이였을 때처럼 이별을 마냥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청년은 마리아에게 돌아가지 못한다면 영영 후회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는 불현듯 마리아가 곧 생을 다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청년은 곧장 마리아에게 가는 길에 올랐다.

        청년은 그녀가 머물 거라고 직감한 옛 성채에 도착했다. 벽에는 후작 가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기다린지 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 하인이 그를 이끌고 한 방문을 열었다. 호수와 노을 진 산이 보이는 창가에 하얀 자태가 보였다. 마리아는 청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주만의 해후를 뒤로 하고, 마리아는 의사가 털어놓았던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관해 얘기한다. 마리아는 의사가 자신을 온당치 않게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청년을 떠나게 한 것이라 설명한다.



|    "… 선생님께서는 저에게서 불행한 사랑을 느끼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그 젊은 친구를 질투하고 계신 거랍니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리아를 보고 있으니 그녀의 사랑스러운 자태가 어스름 빛 속에 더욱 빛나는 듯했다. 그때 그는 아이였을 때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감정이 솟구침을 느끼고서는 이렇게 읊조린다.


|    "마리아"하고 나는 입을 뗐다. "… 사랑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리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느끼고 있습니다. 마리아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본 그녀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좀전의 평온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한밤중 성채를 빠져나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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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목은 마리아가 사랑의 부조리를 겪고 직접 드러내는 장면이다. 겉으로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것만 같았던 마리아가 오히려 괴로워하는 이 이야기의 굴곡점은, 아이 같이 순수한 청년의 사랑과 사랑에 지친 현대인의 입장이 대립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리아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그런데 우리네 시인들은 왜 이런 사랑을 모를까요? 이처럼 환희에 찬 고백과 조용한 이별을! …우리에겐 사랑이 결혼이라는 희극이나 비극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럼 다른 유의 사랑은 진정 없는 걸까요?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마리아는 현대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에 가깝다. 아프고 병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사람들을 취하게만 하는 묘약'이고, 오히려 관계와 일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사랑을 소모적인 것으로 여기고, 여전히 인간의 사랑이 겪을 일시성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반면 화자가 말하는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화자는 마리아가 처한 상황, 질병과 죽음을 앞에두고도 사랑을 말하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이때 화자의 심리는 다시 한 번 '솟구치는 감정'으로 표현된다. 화자가 고통을 잊는 때는 한순간 솟구치는 감정에 투항할 때뿐이다. 청년은 이러한 순간을 두 번 겪었다. 첫 번째는 마리아의 반지를 돌려주기로 마음먹은 순간이다. 마리아는 찰나에 그의 마음속에 영원으로 남았다. 그래서 아이는 청년이 되어서도 자아 속에 사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청년이 마리아에게 고백한 위 본문 속 순간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일시성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은 하나의 점이다. 선이나 면처럼 이어져 존재하지 않고, 찰나 속에서만 존재한다.' 김소연 시인은 작품 「마음사전」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본 작품에서 말하는 사랑도 '찰나'라는 짧은 순간에 있는 것 같다.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믿음 하나만으로 영원할 수 없다. 마리아는 예고된 어둠에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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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왜 마리아를 사랑하는가?


        궁중 고문관인 의사가 그녀를 방문했기에 청년은 이틀이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마리아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생각했다. 그녀는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을까 …

        청년은 마리아와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면서 어렴풋이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그는 고향을 떠났을 때 자신의 자아로 피어있는 그녀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와 재회했을 때 그것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그녀의 실재와 마음이 실로 평온함을 느낄 뿐이었다. 청년은 일순간 완전한 현존과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청년은 그녀에게 갔다. 하지만, 마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것은 수도에서 그들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그것으로 후작이 성으로의 복귀를 자신에게 요구했으며 이 만남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선고였다. 이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청년은 절망하는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신의 섭리를 어기지 말라며 막아선다.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    "… 만약 우리의 사랑이 어떤 높은 법칙을 어긴 것이라면 나도 당신처럼 겸허하게 숙이고 들어가겠습니다. … 그렇지만 우리의 사랑에 맞서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항간의 소문이라는 것뿐입니다.…"



「독일인의 사랑」,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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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장애물은 '신분의 차이'다. 마리아는 명망 높은 후작의 딸이다. 이렇듯 소설은 계속해서 그들이 마땅히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이유에 대해 정면 반박한다. 다음 대사에서 '사랑하게 돼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은 동의어 반복처럼 보이면서도 그의 사랑이 수단이 아닌 목적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이 대사는 소설이 서사 전체에 걸쳐 제시했던 모든 의문들을 관통하는 대답이다. 소설은 이 대사 하나만을 위해 달려온듯한 느낌을 준다.



|    "왜라니요? 마리아!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어났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이에 더하여 마리아의 죽음 이후, 의사가 마리아의 어머니를 청년처럼 사랑하였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데서 소설이 사랑의 초월성까지 나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가 화자에게 유품으로 남긴 어릴 적 반지는 이러한 사랑이 생과 사를 초월해 남아 있음 깨닫게 해준다. 소설은 이러한 초월적 서사를 통해 헌신적이고 목적론적인 사랑에 더없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순간



      「독일인의 사랑」은 군에 복무하던 시절 파주로 2일 외박을 나갔다 만난 책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푹푹 쪘다. 뜨거운 볕을 피해서 나와 친구는 사방팔방으로 카페를 찾았다. 내비에 찍히는 숱한 카페 중에 눈에 들어온 곳은 단연코 헌책방을 겸하고 있는 출판단지 내 카페였다.

        입구에 도착하니 사진처럼 규모가 커 보이지 않고 작은 컨테이너 모양의 건물이었는데, 짙고 푸른 덩굴이 지붕인 것처럼 외벽을 타고 잎을 태평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햇볕이 잎사귀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숲속 비밀 아지트에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카페는 에어컨의 고요하고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책장이 벽을 따라 진열되어 있었고 길 안쪽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인과 함께 오거나 혼자 오거나 두당 테이블을 하나씩 꿰차고 있었다. 주말 오후의 여유를 즐기려는 그들의 눈동자는 마치 현실 너머 어딘가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음료를 주문하고 읽을 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책장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헌책들로 빽빽했다. 거대한 한문이 금박으로 박힌 정체불명의 책과 아무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이 찬장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특유의 헌책방 분위기를 자아냈다. 책을 펼치면 퀴퀴하고 색 바랜 냄새가 났다. 왜인지 체리 색 몰딩이 있던 어릴 적 집이 생각나는 향이었다. 내 방 책장에 꽂혀있던 어머니의 오래된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향수에 젖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어쩌면 책을 읽던 사람들도 자기만의 비밀과 경이 속에 빠져 있던 게 아니었을까?)

        여러 책을 조금씩 읽어보던 중 정직한 굴림체의 자주색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인의 사랑'. '제목이 좀 웃기지 않나? '한국인의 사랑' '중국인의 사랑' '남아프리카공화국인의 사랑' …' 책은 누렇고 지저분했다. 무언가를 끼얹은 자국도 있었다. 발간 연도를 보려고 맨 뒷장을 펼쳤다. 무려 1964년에 1쇄 출판! 시리도록 차가운 커피를 꼴깍 삼켰다. 까마득한 세월이 이 책에 끼얹혀 있었다. 그때 옆 장 여백에 파란색 색연필로 쓰인 글귀가 보였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실소가 새어 나왔다. 급하게 굴러다니던 색연필을 아무거나 붙잡아 휘갈긴 듯한 문장에서 그 사람이 겪은 감동의 순간이 여지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문장을 쓴 사람은 21세기의 누군가가 이 책을 볼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비로 남아야만 삶을 더욱 충만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뮐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독일인의 사랑」 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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