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2011년 절판되었다가,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에 소개되며 입소문을 타 재출간된 앤드루 포터의 단편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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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나와서 친구에게 책을 처음 건네받았을 땐 표지의 오묘한 제목이 단연 눈에 띄었다. 제목을 보고 처음엔 '떨림과 울림' 같은 물리 인문학 에세이가 떠올랐다.
겉에는 제목과 상반되는 연한 색감의 겉표지가 고정되지 않은 채 씌어 있었다. 나중에 책을 읽을 때는 벗겨놓고 읽는 편이 나았다. 겉표지를 벗기면 은은한 그라데이션이 입혀진 속표지가 보인다.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가 세로로 쓰인 표지 디자인은 원서의 것을 일부 가져온 걸로 보인다.) 옅은 개나리색의 속표지가 예뻤다. 양장본은 그 단단함 때문에 보관하기가 용이해서 평소 더 손이 많이 가는 것 같다. 흰색의 가름끈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속표지
띠지엔 백수린 소설가의 경외 어린 문장이 적혀 있었다(나는 띠지도 떼어낸 채로 읽는 걸 선호한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더 쓸 수 있을까. 이 한 권의 소설집 안에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이미 다 들어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문장이 내 도전 의식과 독파 욕구를 자극했던 것 같다. 이런 말은 이미 고전으로 평가받는 서적에나 하는 말이 아닌가? (마케팅은 이렇게 하는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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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책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책 하나를 구입하면, 며칠 동안은 그것만 몇 번이고 읽는다. 마음에 든 책은 몇 주 동안 붙들고 있는다. 하나의 책이 보내주는 장소는 매번 달라진다. 나는 마치 모험가가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것처럼 책의 세계관을 낱낱이 밝혀내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언어는 마치 고립된 섬과 같아서, 제 한계에 갇혀있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풍경을 경험케 한다.
그렇기에 나는 늘상 좋은 판본을 찾으려 한다. 이것은 역시 단어 하나를 허투루 보고 싶지 않은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습관이다. 외국 서적을 고를 땐 번역의 질을 가장 중요하게 따진다. 물론 번역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노력만 하는 편이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경우는 그냥 문학동네에서 출판한 만큼 어련히 잘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리뷰에도 딱히 문제가 없었고 또 문학동네에서 판매하는 판본밖에 없기도 하고 친구에게 받은 책이기도 하고….
결국 번역이야 어찌됐든 무섭게 몰입해서 읽고 말았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무의식 도처에 널려있던 기억의 끝자락을 건드리는 문장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이야기에 몰입해 있다가도, 곧잘 책을 덮고선 과거의 영상 속을 헤매기도 했다. 그제야 띠지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로 이야기가 보여주는 세계엔 다함이 없다.
그런 점에서 (내가 직접 구매하진 않았지만) 가격도 흡족스러웠다. 고작 만 삼천 원 정도에 좋은 질의 소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늘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이 단편소설집의 가운데를 강직하게 관통하고 있는 소재는 '과거'다. 책에 담긴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각자 삶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한때를 간직하고 있다. 그들 전부는 어떠한 이유로 과거에 갇힌 자이다.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주인공 헤더가 자신의 교수였던 로버트와 연인이었던 콜린 사이를 헤매듯이 오가며, 알 수 없는 일련의 감정에 휩쓸렸던 자신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주제를 향한 일관된 내용들을 면면히 밝히려고 했다. 다음엔 그 주제와 주제를 둘러싼 온갖 암시 그리고 상징을 내용에서 찾아 기록했다.
※ 다음부터는 스포일러가 대박 많다.
#1 콜린
주인공 헤더는 대학생 시절 연인이었던 의사 콜린과 결혼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의사의 아내로 살았기에 헤더는 그와의 결혼을 운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제 처지에 체념하면서도 그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고, 이제 큰 이변이 없는 한, 나 역시 의사의 아내가 될 터였다.
수련의의 아내로서 나는 다른 수련이들의 아내들을 위해 오찬이나 저녁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필수 사항이었다.
헤더는 콜린을 두고 '착실한 남자 친구'라 표현하는데, 이 착실함이 콜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콜린은 학교 신문에 정기적으로 사진이 실리는 수영 선수이고, 의예 과정을 마치는 중에 있는 엘리트다. 헤더는 학생 시절 뉴잉글랜드 특권층 출신이 많이 모이는 클럽에서 콜린을 처음 만났다. 콜린을 처음 만난 헤더는 그를 젊고 잘생겼으며, 세계에 대한 건강한 낙관으로 가득 찬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콜린의 착실함은 헤더와의 관계에서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콜린은 헤더를 평가하는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있고, 헤더가 자신에게 '적절한' 인물로서 행동하기를 원한다. 헤더가 자기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축에 속한다고 평하거나 친구들에게 먼저 데이트를 신청하는 쪽이 헤더였다고 거짓말하는 대목에서 그러한 성격이 드러난다. 콜린은 유명한 모범생이기에, 그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했다는 사실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내가 자기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축에 속한다고 했다. (…) 나중에 그는 우리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하곤 했다.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 나였다고 주장했는데…
그러한 특징은 그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콜린의 출신지인 뉴잉글랜드는 상류층들이 경제와 교육을 기반으로 미국의 고급문화를 주도하는 지역이다. 이런 인물 배경은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분명하게 콜린을 전형적인 상류층 엘리트로 묘사하고 있다.
콜린은 그의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쥐어진 역할에 더없이 매진한다. 학생일 땐 공부와 운동에 정진하는 모범생으로, 수련의가 되고는 가정적인 아내가 있는 가장으로서 살아간다. 그는 지나치게 매진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마치 무언가를 향해가는 하나의 절차처럼 보인다.
콜린의 행동 중 가장 눈에 띄는 면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콜린이 헤더에게 질문하는 장면은 콜린이 헤더와 로버트의 만남을 목격했을 때 단 한 번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로버트와의 사이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덮으려 한다. 헤더가 거짓말을 하고 로버트와 만남을 가졌을 때에도, 로버트의 죽음을 듣고서 울음을 터뜨렸을 때에도, 콜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만 침묵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의 잘못에 일관하는 침묵은, 어떤 품위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헤더는 생각한다. 콜린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 캐릭터, 상류층 모범생을 형성해온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콜린이 그 순간 우리 쪽으로 걸어와 소란을 피우지 않은 것은, 우리를 못 본 척하며 로버트에게 자리를 떠날 기회를 준 것은, 아마도 어떤 품위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와 역할은 콜린의 뿌리를 단단하게 이루고 있다. 콜린은 그들의 미래가 이미 정해진 듯이 말하곤 한다. 헤더는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콜린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콜린은 소설에서 가장 갇혀 있는 인물로, 헤더에게로 그 전형성을 확장시키려 한다. 아마 헤더에게 보여준 자비심 또한 자신의 숙명을 마쳐야하는 그의 알 수 없는 책임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들 모두에게 선택은 명료해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그가 가는 곳으로 갈 것이고, 학업은 나중에 이룰 것이었다. 우리는 결혼할 것이었다. (…) 그 순간 그가 나를 너무나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겁이 났지만, 나는 미소를 지었다. 벌써부터 그는 우리가 언젠가 마련하게 될 집과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위의 내용들을 보았을 때 작가는 콜린에게 어떠한 '전형성'을 부여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인물은 헤더다. 헤더는 왜 불안을 느끼면서도 콜린과 결혼하게 될까? 그녀의 판단 기준은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헤더의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고 헤더는 그런 삶을 대물림 받는 편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삶이란 곧 그녀의 어머니가 평생을 살아온 삶, 그리고 그녀의 어린 시절 너무나 익숙했을 일상이다.
헤더가 결혼에 체념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헤더가 콜린에게 로버트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날에 일어났다. 그녀는 로버트와 헤어진 후로 더이상 결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체념한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로버트는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인물이었다.
내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고 (…) 나 역시 의사의 아내가 될 터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내게는 무엇보다 큰 두려움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나를 겁먹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흥분시키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런 헤더의 관점에서는, 콜린을 헤더의 '과거'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헤더의 삶이 어머니와 살았던 삶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헤더의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다. 헤더는 콜린에게 일상적인 편안함과 찰나에는 그들이 반드시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뚜렷한 확신을 느끼곤 한다. 그러므로 콜린은 헤더의 과거를 현재의 헤더에게 보장해줄 수 있는 인물이면서, 과거와 운명, 그것에서 느낄 수 있는 명료함의 상징인 것이다. 콜린이 띠는 전형성 또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암시로 보인다. 전형이란 '틀'이고 틀은 한 순간에 생겨나지 않는다. 틀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대에서 서서히 굳어진 것이다. 콜린의 경우, 뉴잉글랜드라는 환경이 그를 만드는 거푸집인 것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이념과 행동 양식이 시간이 지나며 압축되어 서서히 형성된 전형성, 과거의 전유물. 그것이 콜린이다.
그러나 그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남은 생을 그와 함게 보낼 수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가정을 일구고 그의 곁에서 늙어갈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런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란 것을, 불행하지 않을 수 있으리란 것을, 나는 알았다.
그들의 결혼은 결국 헤더가 과거라는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임을 의미한다. 헤더는 과거로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과거는 우리에게 특정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면이 있다. 우리는 당연하게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현재의 자신이 형성되었다 인식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러한 점을 의식한다고 해도 자신이 밟아온 과거를 부정하거나 그것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헤더가 콜린과의 대화에서 때로 겁을 먹는 일은 그녀를 운명처럼 속박해오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과거에 의존하는 일은 종교의 근본적인 체계와 닮았다. 종교는 삶이 고해라는 가장 태초적인 역설 위에 탑을 쌓고 삶의 온갖 역설과 고통을 다 가져가 버린다. 신도는 교리에 관한 강한 믿음으로 삶을 지탱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끝없는 자기모순과 허무에 부딪혀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다. 그녀는 지금 막 종교에 빠져버린 한 명의 신도처럼 콜린과의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나는 막 나의 삶에 구멍 -정확히 콜린만한 크기와 모양의 구멍- 을 뚫어 열었고, 이제 내 미래를 엮어낼 복잡한 요소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질 터였다.
#2 로버트
로버트는 헤더가 다녔던 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다. 헤더는 로버트를 콜린이 아닌 모든 것으로 기억한다. 로버트는 노인이었고 별거 중인 유부남이었다. 헤더는 로버트와 주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그의 삶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한 물리학 시험에서 시작되었다. 단 하나의 방정식 문제. 헤더는 문제를 끝까지 붙잡고 남아있던 유일한 학생이었고, 이것을 계기로 로버트 교수의 아파트에 초대받게 된다.
"그런데 뭐에 홀려서 우리한테 그런 문제를 내신 거예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인이지요." (…)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로버트는 콜린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물리학자로서 늘 가능성을 묻는다. 물음은 갇히지 않으려는 시도다. 그는 1년을 연구한 끝에 새로운 방정식을 얻어냈고, 그것을 시험으로 제출했다. 여기서 방정식은 등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학자는 의심을 놓는 순간 제 기능을 상실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린다. 그러므로 로버트에게 방정식이란 물리학자로서의 운명을 판결 내리는 집행관인 것이다. 로버트는 늘 자만심을 등지고 발견의 기회를 선택하였다. 콜린은 삶에 안주하지만, 로버트는 그것을 경계한다.
또 로버트는 콜린과 다르게 그녀를 그와 대등한 존재로 대한다. 로버트는 헤더를 편하게 해 준다. 헤더는 그와의 대화에 '자유'가 있음을 느낀다. 로버트는 헤더를 '학생'이라는 틀에 가두어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로움이 그들의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한다. 헤더는 콜린에게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로움에 매료된다. 그들의 화두는 언젠가부터 '물리학'에서 보다 은밀한 삶의 사정들로 나아가며, 헤더는 로버트에게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속마음을 내보인다. 예를 들어,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를 사랑해보는 로망 같은 것은 콜린에게 결코 고백할 수 없는 비밀이다. 이러한 대화의 자유로움은 그들의 관계가 사제지간 이상의 무언가로 진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나를, 내가 상상하기에 자신의 동료를 대할 것 같은 태도로, 성인으로, 대등한 사람으로 대했다.
이제 로버트와 나는 더이상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 나는 콜린에게 언급할 수 없었던 일들을 로버트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헤더에게 물리학자로서 겪게 되는 역설에 환멸을 느낌을 고백한다. 로버트는 언젠가 자신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헤더와 만나지 않을 때 그는 현실에 안착하여 살아간다. 일상에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보다 현실적이고 소박하다. 로버트는 물리학자가 아닌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헤더가 그의 아파트를 갑작스레 방문했을 때, 때로 로버트는 가족과의 식사로 부재하기도 했다.
로버트의 아파트에는 일상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파트는 '어두침침하고 퀴퀴했으며, 페인트칠된 벽은 얼룩덜룩했고, 딱히 가구라고 부름직한 것도 많지 않아, 낡은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 몇 개와 커다란 오크목 책상, 벽에 걸린 핑거 페인팅 몇 개가 다였다. (…) 벽에 걸린 핑거 페인팅 그림들은 딸아이 솜씨라고 했다.'고 묘사된다. 그의 아파트에는 온통 아내와 별거한 남편, 그리고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궁상맞게 얼룩져있다.
헤더는 그의 아파트를 '그 나이대의 교수가 살만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곳'이라 표현한다. 아파트는 로버트가 헤더에게 그 역설에 대한 환멸을 고백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아파트에 있을 때 만큼은, 방정식이 내리는 시험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물리학자 로버트는 무장해제된다. 그러므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아파트는 그 자체로 로버트의 과거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로버트의 모습은 콜린에 가깝다. 그를 현실에 단단히 묶어두는 것은 헤더가 아닌 그의 가족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파트에 초대받은 헤더는 로버트의 삶에 들어온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헤더는 그의 방정식을 풀어내려고 고심한 유일한 학생이었고, 그것이 아파트에 초대받는 계기였다.
로버트와 헤더는 서로에게 자유와 가능성을 선사한다. 이로써 그들의 관계는 과거와 운명에 대한 초월 그 자체를 뜻하게 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가졌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들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불확실하게 묘사되는데, 이러한 모호함도 그들의 관계가 띠는 의미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 쉬워지지요 (…) 자기를 넘어서는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수준"
그는 히터를 줄이고 글렌 굴드의 희귀 녹음 테이프를 틀기 위해 딱 한 번 내 말을 끊었다. (…) "음악과 같아요. 재능과 연습은 음악가를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요." (…) 상승을 향해 가는 아르페지오, 굉음을 향해 가는 크레셴도.
그러나 헤더는 콜린과 결혼하고 헤더의 삶은 영원히 로버트에게서 멀어진다. 그렇게 콜린과의 결혼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 헤더는 로버트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헤더는 로버트와 만났을 때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은 진정으로 그런 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헤더에게 결혼이란 운명에 대한 체념이다. 콜린에게 약속한 대로 헤더는 로버트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약속에 영원히 맹세한 것이다. 그러므로 로버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헤더가 운명에 귀속됨으로써 그것을 초월할 기회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헤더는 스스로 만들어낸 역설에 환멸을 느꼈던 로버트처럼, 제 자신의 방정식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는 로버트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자문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때에도, 콜린이 내게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다보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로버트의 죽음은 헤더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했다. 헤더는 그제야 그녀에게 처해진 현실을 자각한다. 그것은 콜린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과 그녀의 마음에 살아 숨쉬는 로버트의 존재다. 마음의 가역 작용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한때 헤더의 삶을 휩쓸어갔던 폭풍은 지나간 자리에 제 자취를 새겨놓았다. 과거의 잔상, 헤더가 콜린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로버트가 그녀의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까닭이다.
*김소연 시인이 「마음사전」에서 쓴 문장.
그러나 로버트는 하나의 과거에 머물게 되었다. 헤더는 로버트를 '콜린과 같이 자신의 한 부분 어딘가를 채워주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차 안의 침묵 속에서 나는 거리감을,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우리 집의 어둠 속에서 우리 사이에 자라고 있던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3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란 제목은 로버트를 의미할 수 있다. 로버트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교수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물리학의 범주다. 이는 단순한 연관성이지만,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이론'이다. 이론은 언제나 스스로를 파괴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론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이론의 근거가 된다. 너무나도 견고해 보이는 이론도 언젠가 역사의 잔재로 사라질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물리학자인 로버트는 몸을 지상에 두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역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모순성을 지닌 로버트라는 인물의 상징인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로버트와 콜린 사이를 표현하는 비유로 보는 것이다. 헤더도 로버트처럼 모순을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콜린의 아내로 살면서도, 로버트라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즉, 운명이나 과거로 대표되는 명료함과 그에 대한 초월성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로버트와 콜린이라는 실재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이론으로, 헤더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빗댄 표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나'와 '나를 벗어난 모든 것'이 부딪히는 이야기다. '나'를 대변하는 것은 콜린이다. 콜린은 헤더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헤더는 로버트를 통해 '나를 벗어난 모든 것'에 가까워진다. 로버트는 그녀의 과거나 미래에도(죽음 때문에) 존재하지 않지만, 헤더는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 시간을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했다. 그 끝은 로버트조차 '나'에 흡수되는 결말이었다.
(뒤늦게 해설을 보니 한 물리학 실험에서 따온 제목이었다. 전구를 켰을 때, 100개의 빛입자 중 평균 네 개는 반사되어 돌아오고 96개는 유리를 통과한다는 것. 이 실험결과는 기억과 닮았다.)
이 모든 내용이 향하는 종착지는 독자에게 달려있지만, 인상적인 점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과거'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다는 결말이다. 로버트는 죽음에, 콜린과 헤더는 제 운명에, 모두가 제 방정식 속에 갇혔다. 이러한 점에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면을 띤다.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 깊숙한 곳에 로버트를 비끄러맨 채 콜린에 안주하여 산다. 사람들은 대게 자신이 형성해왔던 가치체계를 계속해서 부수고 새우길 반복한다. 체계의 왕좌에 앉았던 것은 곧잘 바닥까지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이 어떠한 길로 가든 간에, 과거로부터 두텁게 형성되어 왔던 자신 속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이것은 똑같은 길이 계속해서 나오는 미로 속을 헤매는 일과 같다. 그 끝에 우리는 권태에 이르길 반복한다. 이것이 그리워하는 병이다. 이 병은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며, 이것으로 우리는 자신에게 자석처럼 다시 이끌려간다. 우리는 헤더처럼 그 어느 순간 체념할 뿐이다.
읽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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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 중에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두 인물로부터 위와 같은 귀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주인공 헤더를 둘러싼 두 인물은 무척이나 반대되는 성질을 띠고 있으며, 작가는 이 내용을 공백 속에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다 - '콜린은 로버트가 아닌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절제되고 간결한 문체가 그 의도성을 숨기고 글 전체를 매끄럽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두 인물은 피상적인 상징에 그치지 않는, 작가의 추상적인 감정이 성숙하게 여물어서 이루어낸 단단한 은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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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담긴 모든 소설은 과거의 특정한 지점, 하나의 사건을 그린다. 본격적으로 글을 읽기 전, 나는 그러한 소설의 공통점을 차례에서 미리 볼 수 있었다. 요컨대, 이 단편소설들의 모든 제목은 소설 속 과거의 사건을 응축하고 있는 단 하나의 단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