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정동, 밀도 높은 인문교양서!
밀도 높은 기술 개론서입니다. 기술 혁명이 폭발을 앞두고 요동치는 지금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 최초의 질문에서 패러다임이 되기까지| 굿모닝 굿나잇 (Good morning Good night)
저자: 이정동
출판사: 김영사
발행일: 2024-09-30
1. 기술은 진화하는가?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는 기술의 진화 과정을 생물의 진화론에 대입해 파헤친다. 기술이 발전하는 원리는 놀랍게도 생물이 진화하는 모습과 무척 닮았다. ‘인체가 뇌, 심장, 간 등 각종 장기와 혈관, 신경망 등 복잡한 연결망’으로 구성된 것처럼, 인간이 만든 제품의 부품 하나하나는 ‘기술진화의 오랜 과정에서 다른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적응되어 결합된 것’이다(82쪽). 그리고 각 부품에 적용된 기술은 생물처럼 변이-선택-전승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다. 신기술의 개발, 혹은 새로운 수요의 창출로 기존 제품에서 분화된 제품이 출시되면 시장의 원리, 소비자의 선호, 인접 가능성 등에 따라 자연스레 선택받고, 기술의 기록은 논문이나 특허, 실물의 형태로 축적되어 또다시 신기술에 전승된다. 반면 기술은 생물보다 눈에 띄도록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서 다르다. 비둘기가 분화하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아주 긴 시간을 되감아야 할테지만, 우리는 몇 년마다 기술의 대격변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이 뒷받침하는 미래는 무엇일까? 만약 기술이 생물처럼 진화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그저 무용지물이 된 이성을 붙잡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에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기술은 인간의 의식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진화를 거듭하여 결국 인간을 역사의 뒤안길에 남겨둘지도 모른다.
2. 또 한번의 기술 혁명을 앞두고, 기술 개론서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는 출판사 김영사의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 열일곱 번째 책으로 발간되었다.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라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급변하는 지식의 패러다임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는 중학생부터 대학생, 일반인까지 전 세대가 가까운 곳에 두고 매일 만날 수 있는, 지식교양총서의 표준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김영사는 이를 두고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내는 지식 라이브러리’, ‘21세기 지식의 새로운 표준’, ‘지혜를 선사하는 길잡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좋은 사전 하나를 통독한 기분이다!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가 쏜살같이 바뀌어 가는 지식 환경을 포착하기 위해 편찬되는 것이라면, ‘기술’이야말로 시리즈에서 가장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일 것이다. 기술은 더 이상 인간이 의지와 행동에 의지해 움직이거나 공기처럼 우리 곁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살아있는 하나의 실체로서 몇 세기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인류와 대면하고 섰다. 누군가 ‘특이점은 온다’고 예언가처럼 말하지 않더라도 변화의 바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거세다. 인류는 난데없이 기계와의 불편한 동거를 준비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인공지능의 견줄 데 없는 발전 속도는 인간과 대등한 능력을 지닌 하나의 기술복합체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폭풍이 지나가면서 절벽을 깎아내듯이, 특이점은 종착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우리의 손이 닿는 모든 곳에서 그 지형을 거대하게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생존의 차원에서 기술을 마주해야 한다.
이 책은 기존 과학 분야의 교양서와 다르게 과학이 아닌 기술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저자는 서두에서 과학과 기술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두고 있다. ‘과학이 사물의 운행과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둔다’면, 기술은 ‘인공물을 만들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목적’이다(19쪽). ‘기술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했지만, 과학은 17세기 근대 과학혁명 이후에 등장’했다(19쪽). 기술은 과학의 도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원시 시대 때 제작되었던 돌도끼조차 인간의 사냥 능력을 증폭해 주는 하나의 기술이다. 현대 기술은 단지 과학 혁명 이후 과학의 내용과 방법이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애초에 ‘기술복합체’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저자는 우리가 현대 문명을 지나치게 당연하게 여기는 바람에 문명의 기저를 떠받치는 기술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공물 종류 하나하나는 ‘모두 다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고, 기술의 종류는 다윈이 파헤쳤던 생물의 종보다 훨씬 다양하다. 과연 기술에서 ‘다윈이 느꼈던 경이보다 더 큰 경이감을 느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14쪽). 우리는 다만 인공물을 자연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기술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어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서 더 의식하기 어렵다. 인터넷이 어느 날 마법처럼 사라졌다고 상상해 보라. 수쳔 년에 걸쳐 쌓아 올린 현대 문명은 쉽게 금이 가고 말 것이다. 인공지능은 머지않아 인터넷과 같은 인간 사회의 ‘운영체제’가 될 예정이다. ‘운영체제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184쪽). 인공지능은 지금 당장에도 여기저기서 기존의 인력을 대체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우리 사회가 점점 인공 지능에 맞추어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점에서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는 현대 사회에 뿌리 박힌 기술의 생태, 소위 ‘테크늄’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이 핵심으로 다루는 이론인 ‘기술 진화론’은 기술을 시대마다 주목받았던 기술을 해체하고 뜯어보며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인간은 이미 기술과 복합체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진화하고 있다. 18쪽
인공 지능의 발전과 함께, 인류는 기술과 공진화하는 관계를 넘어 점차 복합체로서 한 몸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술 진화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은 곧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희미한 상을 그려볼 수 있는 능력’과도 이어진다(18쪽).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품고 기술 진화의 논리를 전개하는 책이다. 책은 아이디어에서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기술이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건물의 설계 도안처럼 한층 한층 그려나간다. 시대를 넘나드는 사례들은 이론을 풍부하게 뒷받침하며 낯선 언어로 집을 만드는 데 접착제 역할을 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개념적 유비로 사용하는 덕에 기술과 신체의 특징이 계속해서 비교되는 점도 주목해 볼만 하다. 이를테면 기존의 기술들을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 수 있다는 ‘조합진화’의 법칙을, 인체에서 20종의 아미노산이 조합되면서 갖가지 단백질을 만드는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식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기술진화의 법칙을 밝히기 위해 인간의 신체를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독자가 기술 ‘진화’의 논리를 자연스레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현상과 본질을 적절히 통합한 덕분에 책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사전이라 느껴질 만큼 밀도가 높다.
저자는 책을 닫으면서 인간에겐 희망이 존재한다고 힘을 주어 말한다. 이 희망이 우리가 기술의 시대에 되새겨야 할 한 가지 가르침일 것이다. 생물은 자연의 순환에 맞추어 우연히 진화한다. 따라서 우리가 시간을 고생물 시대로 되감는다 한들 2024년이 지금과 똑같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면 기술은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다. 다시 말해 기술의 진화 과정에는 속속들이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의 진화도를 펼쳐놓고 보면 시대에 따라 인간이 무엇을 욕망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앞으로도 기술은 인간의 선하거나 악한 의지와 욕망에 따라 모양이 결정될 것이다. 인간은 적어도 역사의 키를 잡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기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수동적으로 예측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기술이 진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환경은 인간사회’이기 때문이다(188쪽). 결국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는 기술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해체하면서 약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윈의 진화론이 신에게서 생명의 기원을 되찾아주는 것이라면 기술진화론은 기술을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에서 다시 제 창조자인 인간의 손으로 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디자인
기존에 ‘굿모닝 굿나잇’은 골조만 남긴 일러스트레이션을 기준 표지 디자인으로 채택하며, 미니멀한 느낌을 주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유유출판사 특유의 가벼운 디자인과 민음사의 인문 잡지 ‘한편’에 쓰이는 디자인과 닮았다. 그러나 짧은 분량과 간소한 판형을 지니면서 더욱 중대한 주제를 다루는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에 기존의 디자인은 책을 너무 가볍게만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디자인은 <유전공학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 유전공학의 발전과 논쟁>에서부터 바뀌었다. 개선된 버전에서는 표지와 내지에서 마찬가지로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하되 일러스트레이션을 실물 사진으로 수정하고, 폰트에도 신경을 쓰면서 전체적으로 세련한 느낌을 주려고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이쪽이 ‘21세기 지식의 새로운 표준’이라는 타이틀에는 더 잘 어울린다.
여담
최근 인공지능의 발전이 대두되면서 옛날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불었던 기술 센세이션이 재차 고개를 들었다.
과학 교양서를 비롯한 전문서가 대중화되는 흐름에 ‘기술 개론서’라는 독특한 지위로 편승할 수 있다.
굿모닝 굿나잇 시리즈는 현대 지식 생태에 분포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지식 패러다임을 분석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식과 교양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우상향하는 추세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서나 실용서와는 다르게 생활과 동떨어져 있어 넓은 수요층을 지니기엔 한계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