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하지 않다

생각은 돌고 돌아 과거의 내가 지금 여기로

by 순남

나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 우리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잖아,라고 말하면, 아아, 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뒤지거나, 구글킵스 메모장을 검색한다.

퍼스트 브레인이 성능이 좋지 않으니, 세컨드 브레인에 의지한다. 어느새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짧게 그날 있었던 사건이나 생각을 뒤죽박죽 기록한다.


예전 메모에서 ‘달리기’를 검색해 봤다. 검색하다 재밌는 걸 발견했다.


2022년 2월 5일. 하고 싶은 일
달리기를 한다. 매월 100킬로를 달린다. 하루 3킬로.


이번에 세운 목표, 100킬로그램이니까, 100킬로미터를 달려보자는 결심은 처음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한 것들을 3년 전에 이미 똑같이 생각한 것이었다.


계절은 돌고 돌아, 2025년 4월이 되었다.

비슷한 계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결심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는 것들.

숱한 시도, 나름대로의 도전들.


매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고, 또 똑같은 생각을 했구나 싶기도 하지만,

물이 반이나 차 있네 하는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어쨌든 나는 “꾸준히” 시도하고 있고, 실험하고 있었다. (기특한 과거의 나 님아~)


의도하지 않았어도, 돌고 도는 나사처럼 돌고 돌아, 결국에는 가려고 하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곳을 향하여, 하나의 점을 향하여.


지금 내가 생각한 것들은 갑자기 떠올린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뭔가를 쉽게 할 수 있다면,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갑자기 에너지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불현듯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과거부터 조금씩 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

파워 워킹하며 걸어가는 아줌마들보다 느리게 달리는 순간도, 걷다시피 달리는 순간도,

그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좀 더 편하게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지브리가 유행이라고 :)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쓴 낙서들.

아무렇지 않게 갈겨쓴 휴지 조각 같은 글들도

쌓이고 쌓여 한 편의 소설이나 책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달리고, 땀 흘리는 것들도 내 몸에 쌓이고 쌓여 단단하고 건강한 몸이 될 것이다.

(지금은 비록 100킬로그램의 과체중 몸일지라도)


생각을 확장해 본다.

이 세게의 풀 하나, 부는 바람, 그 어떤 것도 그냥 있는 것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그들만의 시간과 역사를 쌓는다. 그만한 이유를 쌓는다. 숱한 연을 쌓아, 지금 거기에 있는 그것이 된다.


100킬로미터를 달리겠다는 결심, 2022년 2월에 이미 했던 결심이기 때문에,

지금 다시 그 목표를 떠올리고 달릴 수 있다. 그때보다 더 쉽게 실행할 수 있다.


무의미한 것은 없다. 무의미한 생각은 없다.

당장은 손이 닿지 않는다. 아무리 뻗어도 하늘 높이 떠 있는 미래는 닿지 않는다.

오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꾸준히 손을 뻗는 과거의 내가 쌓이고 쌓여,

쌓이고 쌓인 나를 밟고, 발판 삼아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달리는 순간을 쌓는다. 오늘을 쌓는다. 나선처럼 돌고 돌아 미래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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