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사에게 욕먹은 날, 나는 달린다

감정쓰레기를 땀으로 치환하는 방법

by 순남

#1 출근 지하철 나는 파이터가 된다


이종 격투기에서 다양한 격투기로 승부를 가리는 것처럼.

Fighting을 외치며 링에 들어가는 Fighter처럼.

다양한 직업의 파이터들이 생계를 위해 지하철에 올라선다.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파이터이기 때문이다. 싸워야 하니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실실 쪼개는 순간, 사각에서 들어오는 레프트 훅을 가드 하지 못하고, 직빵으로 관자놀이를 맞을 수도 있다.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았다면, 바로 Knock-Out.


다들 그런 경험이 있는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희망찬 세상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으로 반짝이는 눈, 상큼한 미소를 장착하고 출근했다가 강하게 히트당하고, 다운당한 경험. 한 번쯤 그런 경험을 해봤다면, 차마 출근길에 웃을 수 없다. 링에 내려갈 때까지 방심은 금물.

(상대적으로 퇴근길 사람들의 표정은 좀 더 편안해 보인다. 심지어 대화를 나누며 웃는 사람들도 있다. 회사라는 링에서 내려와 집으로 가는 길은 얼마나 해피한가.)


8시 30분 업무 시간 종이 울리면, 경기 시작이다.

분노와 경계심을 연료 삼아 회사라는 옥타곤 케이지에 올라선다. 김대리는 이단 옆차기 같은 기획서를 날리고, 이 부장은 플라잉 암바를 걸듯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어떤 이는 하단 태클을 걸듯 자세를 낮춰 빠르게 임원실로 들어가 보고를 올리기도 한다.

아름다운 이종 격투의 세계. 각자의 기술로 승부를 겨루는 세계.

우리는 모두 파이터다. 다시 한번 파이팅!



#2. 우리 회사 빌런 김이사

그런데 말입니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룰(Rule) 대로 승부가 이뤄지면 좋겠는데,

프로답지 못하게 감정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새 내 회사 생활의 빌런은 김이사(님)가 그렇다. 기분에 따라 사람이 180도 달라진다.

좋은 날은 한껏 자애로워진다. 작은 실수도 별말 없다. 그런 날은 주로 주식이 올랐거나, 맛있는 밥을 먹었거나, 사장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 등이다.

반대로 개인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자신의 감정 쓰레기를 싸지른다. 이상하다. 별 잘못한 게 없는데, 이 새끼, 저 새끼 욕을 한다. 때로는 말투와 뉘앙스를 갖고 시비를 건다.


나한테 불만 있냐. 그게 맞는 태도냐. 키보드 소리 시끄럽다, 거슬린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

실컷 욕을 하고 나서는,

나중에 주로 많이 하는 말이 다 널 위해서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렇게 안 한다. 너를 특별히 아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한다.


이것은 가스라이팅. 실컷 욕 해놓고, 사탕주기 전법.

너는 더 능력 있는 사람인데, 너 지금 상태가 안 좋아. 그래서 뭐라고 하는 건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다 너를 알아보고 더 키워주려고 하는 거야. 욕을 하면 할수록 더 성장할 거야. 그러니까 욕은 너한테 좋은 약이야. 좋은 약이 원래 좀 쓰잖아.
(나야말로 부하 직원의 성장을 돕는 상사야. 관리자로서 제 역할을 잘하고 있어.)

회사 일이 그렇다. 일 때문에 힘든 것보다 사람 때문에 힘들다. 사람들이 한 말을 속에서 소화하려니까 힘들다.


#3. 그런 날일수록 퇴근하고 어떻게든 달린다.

기력이 없고 눕고 싶은 생각 밖에 안 들지만, 억지로라도 몸을 끌고 나오면, 없던 기운이 솟아오른다.

달리면 달릴수록 기운이 생긴다. 기분이 좋아진다.


또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배출하지 않기 위해 달려야 한다. 욕을 많이 먹어서 토할 지경으로 집에 가면 그 감정 쓰레기를 토해 내는 대상은 집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렸던 가족이다. 가만히 나를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토하고 싶은가? 아니다. 입 틀어막고, 감정 쓰레기가 뿜어져 나오기 전에 한강으로 나와야 한다. 감정 쓰레기를 토해 내는 대신 땀을 흘린다. 몸과 영혼에 쌓인 노폐물을 뜨거운 액체로 뽑아낸다.


말이란 것은 허공에서 디딜 곳은 찾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뜨거운 땀은 눈에 보인다. 만져진다. 더 확실한 것이 되어 눈앞에 보인다. 눈에 보이니까 괜찮아지는 것이다. 소변 색을 보고, 자가 체크하듯이 땀을 보면서 감정이 해소되었구나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욕먹은 날 달려야 하는 이유는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나에게 욕한 김이사는 인생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 사람을 머릿속에 계속 넣고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없다. 내 머릿속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다. 달리고 있으면, 내 호흡, 내 심장 소리, 내 발소리, 나의 것으로 세상이 채워진다. 정말 중요한 것, 나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회사에서 욕먹은 날 눈물을 흘리는 대신, 달린다. 회사에 있는 내내 퇴근하고 달릴 생각을 부릉부릉 시동 걸다가, 집에 도착하는 즉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달린다. 아침엔 파이터로 출근했지만, 저녁엔 러너가 되어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러고 나면 좀 살 것 같다. 더 숨차게 달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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