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모으고 보는….
나는 오래된 지병이 있다.
내 눈에 꽂히는 예쁜 그림이라면 무엇이든 저장하고 본다.
인쇄된 종이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병이다.
사람들은 쓱 보고 버리는 쓰레기지만 나에게만큼은 근사해서 보고 또 보고, 따라 그려 보고 싶다. 그래서 버리기 전 필요한 부분만 선별해서 보관한다. 말이 좋아 보관이지 그냥 쌓아놓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왜 나는 그런 것들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은 강하지만 능력은 부족한 데서 오는 자격지심일지 모른다. 앞으로 나아질 그림 실력을 기대하며 그 종이들을 대하기 때문에 모아두는 것이리라. 그래서 예쁜 종이에 진심인 사람이 되었고, 나에게 예쁜 쓰레기 모으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시간을 거슬러 예쁜 쓰레기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부터다. 각종 책갈피, 껌 종이, 엽서, 카탈로그, 책, 음반 등 가지각색의 것들이었다. 책갈피는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살 때마다 무료로 한 두 개씩 가져올 수 있었다. 책갈피에는 좋은 시가 적혀 있거나, 명언이 적혀 있었다. 서점에 갈 때마다 다른 시구절이나 명언이 있으면 챙겨서 오고, 이미 똑같은 것이 있으면 친구와 교환을 하기도 했다. 보통은 읽던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책갈피가 필요했다면 나는 다양하고 예쁜 책갈피 자체가 목표였다.
두 번째로 모았던 것은 껌 종이였다. 아카시아껌, 스피아민트, 후레쉬 민트, 이브껌 …껌 한 통이 100원 정도 하던 시절, 과자보다 껌을 자주 샀다. 나는 껌 꽤나 씹던 언니였다. 씹기 시작할 때의 단물도 좋고 오래 씹을수록 입안이 상쾌해지고 정리되는 느낌이 난 좋았다. 껌을 씹으려고 샀지만, 자동으로 생기는 껌 종이도 마음에 들었다. 껌 종이에 명언이 적혔거나 이쁜 그림이 등장했던 걸로 봐서 나처럼 껌 종이를 모으는 사람들을 공약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구겨지기 전 조심해서 벗긴 껍질을 책 사이에 넣어 납작하게 펴주는 작업도 필요하다. 조심조심 다뤄야 깨끗한 껌 종이가 탄생하는데, 향기는 덤이다. 껌 종이에서 나쁜 냄새나는 걸 본 적이 없다. 사실 책갈피에 비교하면 특별하달 것도 없다. 코팅도 되어있지 않아 물이라도 묻으면 큰일이기 때문에 아무 데나 보관할 수도 없는 종이다. 향기 나는 종이.
학창 시절 나의 3대 컬렉션은 책갈피, 껌 종이, 그리고 엽서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뱅글뱅글 돌리면서 고를 수 있는 엽서 코너를 좋아했다. 문방구가 따닥따닥 네 군데나 모여있어서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새로운 엽서를 만나는 시간은 행복했다. 돈이 없어 구경만 했던 날도 종종 있었다. 사진엽서, 일러스트 엽서, 명화 엽서, 수채화 그림엽서 등등 친구와 주고받던 엽서까지 모았다. 돈을 들여 산 것이 대부분 이어서인지 책갈피나 껌 종이에 비해 귀한 대접을 했었다. 때마침 이것들을 담을 보물 상자까지 생겼다. 삼촌 결혼식에서 사용했던 폐백 음식용 상자였는데, 하늘색에 튼튼해 보이는 플라스틱 상자여서 탐이 났다. 할머니에게 겨우 하나를 얻어 내어, 내 보물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다.
하늘색 상자를 열어 볼 때마다 그 속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보며 씩 웃곤 했다. 기분이 좋은 날에도 좋지 않은 날에도, 학교 가기 전에도, 다녀와서도, 수시로 열어보면서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모으면서, 구경하며, 얼마나 모았나? 세어보며, 할 일 없이 뚜껑을 연신 여닫았다. 엽서, 껌 종이, 책갈피 모으기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대학생이 되며, 새롭게 모으게 된 예쁜 쓰레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패션 카탈로그였다. ‘디망쉬’라는 신발 브랜드의 카탈로그를 특히 좋아했는데 색깔이 다양했고, 디자인이 예쁘고 질 좋은 종이였다. 가끔 이 종이들은 편지 봉투로 만들어지거나, 선물포장지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패션 카탈로그를 활용해서, 받는 이로 하여금 예쁘다는 칭찬을 들을 때면 뿌듯했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나의 수집은 계속되었다. 음악을 좋아해서 신곡이 나올 때마다 사는 CD와 새로 나오는 책도 자동으로 쌓여갔다. 쉽게 살 수 있어서인지 중, 고등학교 때 모으던 것들보다 소중함은 덜했다. 시도 때도 없이 뚜껑이 열렸던 하늘색 상자는, 주인이 바쁘게 사회생활 하는 동안 닫힌 채 시간이 흘렀다.
대청소를 하던 중 문득 하늘색 상자가 떠올라 서둘러 찾기 시작했다. 존재를 잊진 않았으나 오랫동안 찾지 않았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느라, 얼마나 정신없이 살았으면 10년 동안이나 잊고 살았는지 의아했다. 오 마이 갓! 상자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상자를 찾느라 집을 뒤집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가족들에게 애끓는 마음으로 상자의 색과 모양을 설명했지만 그런 상자가 있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소중히 생각했던 상자인데 가족도 몰랐다고 하니 더 속상했다. 꼭꼭 숨어 못 찾는 것이 아니었다. 없어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태였다. 상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가 폐지와 함께 팔아 버린 것 같다는 동생의 증언을 들었다. 그 당시 할머니는 병, 박스, 캔 같은 돈 되는 고물을 모아서 팔곤 했었다. 심지어 이웃에서 할머니를 돕겠다고 대문 앞에 고물들을 갖다 놓는 통에 대문 앞이 항상 너저분했다.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할머니에게 무게가 나가는 패션 카탈로그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하늘색 상자에 들어있었던 건 무게도 양도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왜? 할머니는 하늘색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이 무엇인지 누구 것인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거 누구 끼고? 필요한 기가? 팔아도 되는 기가?”하고 물어봐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소중하게 모아 놓은 거예요.” “팔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텐데. 듣는 이도 없는데 혼자서 중얼거린다. 지금 생각해도 열불이 솟구친다. 눈물도 나려 한다. 속상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에휴-. 하늘색 상자를 오랫동안 챙기지 못했던 내 잘못이다.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학창 시절 나를 즐겁게 해 준 친구였는데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채 헤어졌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 안에 든 물건은 그립고 아깝다. 내 어린 시절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해지기까지 한다. 한때는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예쁜 종이와 하늘색 상자, 몹시 궁금해진다. 고물상에 팔려 간 내 상자 속 종이들의 무게는 얼마나 나갔을까? 할머니에게 보탬이 되긴 했을까? 재활용되어 또 다른 종이로 태어났을까?
아니면 억세게 운 좋은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하늘색이 아닌 핑크색 상자 속에 살고 있을까?